지금 우리가 채워야 하는 것은… 마곡사(麻谷寺)|공간이 마음을 움직인다

지금 우리가 채워야 하는 것은…

마곡사(麻谷寺)


문상원

아주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충남 공주(公州)를 중심으로 북서측에 위치한 태화산(泰華山) 마곡사와 그와 대칭으로 자리한 계룡산(鷄龍山) 갑사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글귀입니다. 충남을 대표하는 두 사찰의 아름다움을 계절과 어우르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동백꽃이 피는 계절이면 고창 선운사(禪雲寺)를 떠올리듯 그렇게 마곡사와 봄은 오랜 시간 함께한 좋은 파트너임이 분명합니다.

여름의 끝에서 초가을로 접어드는 오늘… 당신과 함께 마곡사로 떠납니다.춘하추동(春夏秋冬) 4계절을 선물 받은 우리가 특정한 계절만을 고집해 답사지를 찾는 것은 선물을 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답사지라도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가오는 감정이 다른 것은 저의 낡은 답사 노트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 책장에 두었던 먼지 쌓인 책을 시간이 흘러 다시 펼쳤을 때 느끼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마곡사를 만나러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섭니다.

마곡사는 유명한 사찰입니다. 

특히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한국의 산지승원(山地僧院)’ 중 한 곳으로 선정되면서 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너른 주차장과 많은 식당, 숙박 시설을 갖추어 여느 관광지와 다르지 않은 진입로의 모습에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를 기대하고 오는 이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울수 있겠습니다만 저 멀리 일주문(一柱門)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어지러운 간판 대신 녹음(綠陰) 가득한 숲길로 채색되는 순간… 발아래로는 여름내 비를 머금었던 계곡의 물소리가 베이스로 웅장하게 흐르고 머리 위로는 뜨거운 태양 같은 강렬한 매미의 울음소리가 소프라노로 울립니다. 

마치 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일주문의 경계에서 서라운드로 펼쳐지는 BGM(BackGround Music)이 이곳 마곡사 진입로를 가득 채우며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소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요란한 간판과도 같았던 저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했습니다. 봄(春)만을 고집하지 않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았습니다.

물이 없는 사찰도 드물지만 마곡천(麻谷川)같이 너른 계곡을 품은 사찰도 드물어 이곳 진입로는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장면을 연출하며 지루하지 않게 사찰로 안내해줍니다. 사실 사찰 경내에도 너른 주차장이 있어 쏜살같이 폼 나게 지나가는 분들도 많이 눈에 띄지만 당신과 함께 걷는 이 길이기에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계곡을 크게 돌아 걷다 보면 마곡사의 첫 모습이 측면으로 잠시 보였다 이내 사라진 후 다시 반대로 길이 꺾이면 태태화산 마곡사(泰華山 麻谷寺)라는 잘생긴 돌표식과 함께 드디어 해탈문(解脫門)에 이릅니다.

마곡사 가람배치(伽藍配置)의 가장 큰 특징은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개울 아래 영산전(靈山殿) 영역과 개울 너머 대광보전(大光寶殿) 영역으로 완전하게 나뉘어졌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주전(主殿)을 한 사찰에 모시는 방법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때론 경사지를 활용해 수직으로 위계(位階)를 부여하기도 하고 좌우 수평으로 나란히 배치해 평등(平等)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며 여기 이곳 마곡사처럼 개울이라는 자연 요소를 활용해 서로 다른 영역(領域)임을 그 자체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개울 아래 영산전 영역은 따뜻함 그 자체였습니다. 동향(東向)으로 자리 앉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인 매화당(梅花堂), 선방인 수선사(修禪寺), 강당 기능의 흥성루(興聖樓)가 햇살 가득한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나란히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듯 지붕을 맞대고 있고 잘 가꾸어진 꽃밭과 흙기와 담장을 껴안고 있는 담쟁이덩굴에서도 엄마의 손길 같은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이와 반대로 해탈문과 천왕문(天王門), 극락교(極樂橋)를 지난 대광보전 영역은 호방(豪放)함이었습니다.

마곡천을 가로지르는 넉넉한 극락교를 건너면 범종루(梵鍾樓)가 먼저 반기고 이내 오층석탑이 있는 너른 마당을 중심으로 남향(南向)의 대광보전, 심검당(尋劍堂), 응진전(應眞殿)으로의 시야가 거침없이 열려 있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 강당 기능인 누각(樓閣)을 전면에 두어 주전(主殿)인 대광보전을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여지를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라 생각되었을 때 그제서야 지나온 해탈문과 천왕문의 자리 앉음을 다시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는 해탈문과 천왕문이지만 진입(進入)의 축(軸)을 일직선으로 하지 않고 미묘한 각도로 틀어줌으로 진입부에서 이미 시선축(視線軸)을 적절하게 조율하고 있었습니다. 상수(上手)와 하수(下手)의 차이였습니다.

사춘기 소년같이 키만 훌쩍 커버린 듯한 세장비(細長比)와 이국적인 헤어스타일을 가진 다소 낯선 모습의 오층석탑을 돌아 백범(白凡) 선생의 사연이 녹아 있는 백범당과 선생이 심은 한 그루의 향나무에서 한참 동안 당신이 남긴 사진과 글이 보관된 액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사찰의 가장 높은 곳인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오릅니다.흔치 않은 중층(中層)의 외형으로 여러 가지 건축적인 의미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뒤돌아 바라볼 때 보이는 지붕과 지붕이 서로 맞대어 이어진 마곡사의 전경을 저는 더 좋아합니다. 

흔히들 ‘건축(建築)은 자연(自然)을 닮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물결치듯 어울려 흐르는 듯한 지붕선은 마치 여러 봉우리들이 손잡아 능선으로 이어지는 우리들 익숙한 산세(山勢)와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로부터 우리의 산을 이야기할 때 ‘산이 높다’가 아닌 ‘산이 깊다’라는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곡사라는 이름은 신라의 고승(高僧) 자장 율사가 창건 당시 설법(說法)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마치 삼나무(麻)같이 빽빽하게 계곡을 가득 채웠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계곡 물소리와 산새 소리, 바람 소리로 가득합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백범(白凡)을 품어 칠천만의 우리를 있게 해준 헤아리기 어려운 도량(度量)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이’가 아닌 ‘무엇을 어떻게’라는 마음이 먼저일 거라 생각되어집니다.

오늘도 이곳 마곡의 개울물은 사연 가득한 금강(錦江)을 거쳐 서해바다로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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