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정성을 다한다면…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 수마노탑
이창경 신구도서관재단 이사·수필가

향하는 발길, 인연으로 이어지고
취암 스님은 오랜만에 금강산 산문을 나섰다. 굳은 발심으로 금강산을 찾아든 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진 것은 등에 진 허름한 바랑뿐이었지만 마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금강산을 찾아들 때의 그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투명한 늦가을 햇볕이 한가롭게 느껴졌다.
6년 전 금강산을 찾았을 때 스님은 회의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불문에 귀의해 수행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룬 것은 없었다. 해가 갈수록 조급함도 더했다. 이승과의 연이 다하는 날, 무엇을 남겨두고 갈 것인가? 참으로 부질없는 생각이었지만, 이어지는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택한 것이 금강산이었다. 그것이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며칠째 걷고 또 걸었다. 태백산 준령을 넘었다. 어디라고 딱히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길이 있으니 가고, 해가 저무니 가던 발길 멈추는 무념의 수행 길이었다. 그렇게 열흘을 걸어 도착한 곳이 정선 정암사였다. 태백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으로는 금대봉, 남으로는 은대봉, 그 품에 안겨 있는 보궁, 그 보궁 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마노탑. 절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먼저 보궁에 들러 예를 올린 스님은 곧바로 수마노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직 11월인데도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합장하고 탑 주위를 경건히 돌고 있는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탑의 위용에 비해 스님은 너무 작아 보였다. ‘저 스님은 무슨 간절한 소망이 있는 걸까?’ 취암 스님도 합장하고 뒤따라 탑을 돌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호롱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설파 스님과 마주 앉았다. 수마노탑을 경건히 돌며 발원하던 바로 그 스님이었다. 초면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스님께선, 어떤 간절한 소원이 있기에 그리도 경건히 탑을 도셨는지요?”
“예, 탑이 쇠락해져 부처님께 힘을 보태달라고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자장 율사께서 진신사리를 모신 거룩한 탑이지요. ”
“예. 탑의 전돌이 하나둘 빠져나오고…. 어떻게든 불사를 해야겠는데, 간절히 기원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어서. 오늘이 백일째 되는 날인데, 마침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아, 그러셨군요.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취암 스님은 이제야 자신의 발길이 왜 이곳 정암사로 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탑의 불사가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마지막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스님은 자장 율사의 그 마음으로 중수 불사를 발원하고 잠을 청했다. 이때가 1769년 조선 영조 임금 때의 일이었다.

정암사 적멸보궁
정성 모아 회향하다
수마노탑의 중수는 이듬해 초 3개월 정근으로 시작되었다. 중수 계획이 알려지자, 마을에서는 지난 계사년 중수 때와 마찬가지로 재앙이 있을까 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왕실에서 향과 초를 내리고 단월 관흥 스님, 은휴 시연 스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화주, 장인이 정해지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7개월 만에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정교한 기법, 절제된 형태, 모전탑의 완벽한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옥개석 끝에 달린 풍경 소리는 그대로 자연의 법문이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스무 날. 대낮인데도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천지가 진동하며 번개가 쳤다. 상륜부의 찰간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려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여러 유구들이 조각나 흩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었다. 어렵게 중수한 탑이 채 1년도 못 가 상륜부가 파괴된 것이다. 취암 스님은 무엇보다 이변이 마음에 걸렸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오직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다시 힘을 모으기로 했다. 1772년(영조 48) 안성의 숙련된 장인에게 특별히 부탁해 놋쇠 찰간을 다시 제작했다. 상륜부를 봉안하는 날, 취암 스님과 설파 노선사는 떨리는 마음으로 탑 앞에 엎드렸다. 탑을 향한 대중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다면 방광으로 보여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가득 뻗쳤다. 그 상서로운 기운은 정암사 경내는 물론 아래 계곡까지 가득 메웠다. 모든 대중이 환희로운 마음으로 복원 불사를 회향할 수 있었다. 탑 7층, 놋쇠 찰간 5층, 풍경이 32개, 더없이 정제되고 의연한 자태 그대로였다.
다시 금탑·은탑을 생각하며
중수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스님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금대봉·은대봉 어디엔가 있다고 하는 금탑·은탑이었다. 마음의 눈으로 그 탑을 보고 싶었다. 불사를 마무리하고 스님은 영지(影池)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노쇠한 모습이 영지에 비칠 뿐이었다. 낡은 가사, 그 낡은 가사처럼 주름진 얼굴.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장 율사를 생각했다.
“스님, 자장 스님. 욕심의 눈으로 보면 금탑·은탑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머님께 저 못 가운데 비친 금탑과 은탑을 보여드렸다고 하지요? 이제 마음 모아 정성 다해 수마노탑 중수도 끝냈습니다. 맑은 수면에 비친 거룩한 탑을 보고 싶습니다.”
그의 기원은 간절했으나, 탑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수마노탑 이상의 금탑·은탑은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단지 탐욕을 다 내려놓고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발길을 돌렸다. 더 집착하지 않았다. 수마노탑에서 울려오는 풍경 소리가 가을의 정적을 흔들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정암사에 있는 수마노탑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자장 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진신 사리를 받아와 봉안했다는 수마노탑. 천년 세월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오늘을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 2020년 역사성, 예술성,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이 탑에 얽힌 설화는 『삼국유사』에서 비롯된다. 1972년 수마노탑 해체 복원 공사를 하면서 출토된 다섯 매의 탑지석에도 보수 시기, 공사 기간, 참여 인원 등 불사 규모에 관한 내용과 당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1778년 취암 스님이 편찬한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 사적』에도 수마노탑을 지키기 위해 기도 정진한 여러 스님들과 대중들의 신심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 수마노탑에 신성성을 갖게 한 자장 율사의 구도정신, 이를 지켜가기 위한 취암 스님 등 여러 스님의 공덕은 이야기를 넘어 돌에 새기고 종이에 적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창경|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수필가로 활동하면서 신구도서관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예운동』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함께 걷는 책의 숲』 등이 있다.
오직 정성을 다한다면…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 수마노탑
이창경 신구도서관재단 이사·수필가
향하는 발길, 인연으로 이어지고
취암 스님은 오랜만에 금강산 산문을 나섰다. 굳은 발심으로 금강산을 찾아든 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진 것은 등에 진 허름한 바랑뿐이었지만 마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금강산을 찾아들 때의 그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투명한 늦가을 햇볕이 한가롭게 느껴졌다.
6년 전 금강산을 찾았을 때 스님은 회의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불문에 귀의해 수행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룬 것은 없었다. 해가 갈수록 조급함도 더했다. 이승과의 연이 다하는 날, 무엇을 남겨두고 갈 것인가? 참으로 부질없는 생각이었지만, 이어지는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택한 것이 금강산이었다. 그것이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며칠째 걷고 또 걸었다. 태백산 준령을 넘었다. 어디라고 딱히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길이 있으니 가고, 해가 저무니 가던 발길 멈추는 무념의 수행 길이었다. 그렇게 열흘을 걸어 도착한 곳이 정선 정암사였다. 태백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으로는 금대봉, 남으로는 은대봉, 그 품에 안겨 있는 보궁, 그 보궁 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마노탑. 절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먼저 보궁에 들러 예를 올린 스님은 곧바로 수마노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직 11월인데도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합장하고 탑 주위를 경건히 돌고 있는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탑의 위용에 비해 스님은 너무 작아 보였다. ‘저 스님은 무슨 간절한 소망이 있는 걸까?’ 취암 스님도 합장하고 뒤따라 탑을 돌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수마노탑 중수를 발원하고
호롱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설파 스님과 마주 앉았다. 수마노탑을 경건히 돌며 발원하던 바로 그 스님이었다. 초면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스님께선, 어떤 간절한 소원이 있기에 그리도 경건히 탑을 도셨는지요?”
“예, 탑이 쇠락해져 부처님께 힘을 보태달라고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자장 율사께서 진신사리를 모신 거룩한 탑이지요. ”
“예. 탑의 전돌이 하나둘 빠져나오고…. 어떻게든 불사를 해야겠는데, 간절히 기원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어서. 오늘이 백일째 되는 날인데, 마침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아, 그러셨군요.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취암 스님은 이제야 자신의 발길이 왜 이곳 정암사로 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탑의 불사가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마지막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스님은 자장 율사의 그 마음으로 중수 불사를 발원하고 잠을 청했다. 이때가 1769년 조선 영조 임금 때의 일이었다.
정암사 적멸보궁
정성 모아 회향하다
수마노탑의 중수는 이듬해 초 3개월 정근으로 시작되었다. 중수 계획이 알려지자, 마을에서는 지난 계사년 중수 때와 마찬가지로 재앙이 있을까 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왕실에서 향과 초를 내리고 단월 관흥 스님, 은휴 시연 스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화주, 장인이 정해지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7개월 만에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정교한 기법, 절제된 형태, 모전탑의 완벽한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옥개석 끝에 달린 풍경 소리는 그대로 자연의 법문이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스무 날. 대낮인데도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천지가 진동하며 번개가 쳤다. 상륜부의 찰간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려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여러 유구들이 조각나 흩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었다. 어렵게 중수한 탑이 채 1년도 못 가 상륜부가 파괴된 것이다. 취암 스님은 무엇보다 이변이 마음에 걸렸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오직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다시 힘을 모으기로 했다. 1772년(영조 48) 안성의 숙련된 장인에게 특별히 부탁해 놋쇠 찰간을 다시 제작했다. 상륜부를 봉안하는 날, 취암 스님과 설파 노선사는 떨리는 마음으로 탑 앞에 엎드렸다. 탑을 향한 대중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다면 방광으로 보여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가득 뻗쳤다. 그 상서로운 기운은 정암사 경내는 물론 아래 계곡까지 가득 메웠다. 모든 대중이 환희로운 마음으로 복원 불사를 회향할 수 있었다. 탑 7층, 놋쇠 찰간 5층, 풍경이 32개, 더없이 정제되고 의연한 자태 그대로였다.
다시 금탑·은탑을 생각하며
중수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스님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금대봉·은대봉 어디엔가 있다고 하는 금탑·은탑이었다. 마음의 눈으로 그 탑을 보고 싶었다. 불사를 마무리하고 스님은 영지(影池)로 갔다. 아무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노쇠한 모습이 영지에 비칠 뿐이었다. 낡은 가사, 그 낡은 가사처럼 주름진 얼굴.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장 율사를 생각했다.
“스님, 자장 스님. 욕심의 눈으로 보면 금탑·은탑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머님께 저 못 가운데 비친 금탑과 은탑을 보여드렸다고 하지요? 이제 마음 모아 정성 다해 수마노탑 중수도 끝냈습니다. 맑은 수면에 비친 거룩한 탑을 보고 싶습니다.”
그의 기원은 간절했으나, 탑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수마노탑 이상의 금탑·은탑은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단지 탐욕을 다 내려놓고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발길을 돌렸다. 더 집착하지 않았다. 수마노탑에서 울려오는 풍경 소리가 가을의 정적을 흔들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정암사에 있는 수마노탑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자장 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진신 사리를 받아와 봉안했다는 수마노탑. 천년 세월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오늘을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 2020년 역사성, 예술성,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이 탑에 얽힌 설화는 『삼국유사』에서 비롯된다. 1972년 수마노탑 해체 복원 공사를 하면서 출토된 다섯 매의 탑지석에도 보수 시기, 공사 기간, 참여 인원 등 불사 규모에 관한 내용과 당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1778년 취암 스님이 편찬한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 사적』에도 수마노탑을 지키기 위해 기도 정진한 여러 스님들과 대중들의 신심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 수마노탑에 신성성을 갖게 한 자장 율사의 구도정신, 이를 지켜가기 위한 취암 스님 등 여러 스님의 공덕은 이야기를 넘어 돌에 새기고 종이에 적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창경|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신구대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수필가로 활동하면서 신구도서관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예운동』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함께 걷는 책의 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