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가 들려주는
강과 나무와 숲의 노래
여주 신륵사 숲과 나무

신륵사 구룡루와 그 앞의 은행나무와 참나무. 두 나무 모두 600년 넘게 살았다.

불이문을 지나 신륵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

신륵사의 상징인 다층전탑(보물)
한강을 곁에 두고 숲과 나무 기르며 거기 서 있는
‘안심의 벽절’, 신륵사
신륵사는 한때 ‘벽절’로 불렸습니다. 이 ‘벽’은 막아서고, 가르고, 구분하는 벽이 아닙니다. 열고, 이어주고, 밝혀주는 벽입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살펴 어루만지는 ‘등불’ 같은 벽. 세상에는 그런 벽도 있습니다.
신륵사가 벽절로 불리게 된 까닭은 한강과 맞닿은 도량 남쪽 구릉에 다층전탑(보물)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을 본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벽절’이라는 말을 입에 붙였습니다. 이 탑은 고려 시대에 세워졌습니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바뀌면서 도읍 또한 경주에서 개경으로 바뀌었고, 한강 뱃길은 더없이 요긴해졌습니다. 한강 수운을 통해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나르게 된 것입니다.
여주 지역을 관통하는 남한강을 특별히 ‘여강’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신륵사 전탑 어름에서는 강굽이가 심하게 휘어집니다. 큰물이 지는 때는 물결이 크게 요동쳐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신륵사 전탑은 ‘등대’ 역할을 했고, 신륵사는 뱃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안심의 벽절’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신륵사는 고려 때의 벽절이 아닙니다. 한강 역시 뱃길로서의 구실을 놓은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벽절이 필요합니다. 인생이라는 강물은 무시로 사나워지기 때문입니다.
신륵사 산문에 들자 은행나무 가로수가 길을 열어줍니다. 그 옆으로는 느티나무가 동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불이문을 지나자 굴곡진 소나무가 하늘을 화선지 삼아 골기 서늘한 묵화를 그려 보입니다. 한강 가 언덕에는 막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 같은 지붕을 인 정자가 서 있습니다. 거기 올라가 앉았습니다. 한강물이 눈에 너울지고 둔치의 느티나무가 강바람을 잡았다 풀어놓으며 넌지시 소매를 잡아당깁니다.

신륵사 전탑 앞 강월헌에서 ‘물멍 삼매’에 빠진 사람들

신륵사 앞마당의 참나무. 수령이 600년을 훌쩍 넘었다.

신륵사 앞 한강 물가 언덕의 느티나무
‘물멍’ 하기 좋은 한강과 한몸을 이룬 절
한강과 한몸을 이룬 절 앞마당엔 600세 넘은 은행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 높이와 품의 넓이는 능히 하나의 숲을 감당할 만합니다. 막무가내로 푸르고 푸른 1년생 나무 600그루를 몸에 지닌, 나이가 지워진 듯 곱게 늙은 거목입니다. 그 나무의 그늘을 걸어 전탑으로 가서 한 바퀴 탑돌이를 하고 강월헌에 앉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경탄할 만한 언어 감각이 빚은 ‘물멍’을 하기에 딱 좋은 자세가 나옵니다.
절 북서쪽 뒤편 조사당 옆 부도 옆으로 봉미산 자락을 오릅니다. 시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크게 반원을 그리며 절을 감싸는 숲길입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숲속에 들어온 느낌으로 충만합니다.
신륵사는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 하나 믿을 만한 근거는 없고, 고려 말 나옹 스님(1320~1376)이 이곳에서 열반함으로써 사격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신륵사 일주문을 나서면서 꼭 들어야 할, 아니 저절로 듣게 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水如風而終我)
나옹 스님이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노래입니다. 나옹 스님의 그 노래를 들려주려고 신륵사는, 한강을 곁에 두고 숲과 나무를 기르며 거기 있습니다.
신륵사가 들려주는
강과 나무와 숲의 노래
여주 신륵사 숲과 나무
신륵사 구룡루와 그 앞의 은행나무와 참나무. 두 나무 모두 600년 넘게 살았다.
불이문을 지나 신륵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
신륵사의 상징인 다층전탑(보물)
한강을 곁에 두고 숲과 나무 기르며 거기 서 있는
‘안심의 벽절’, 신륵사
신륵사는 한때 ‘벽절’로 불렸습니다. 이 ‘벽’은 막아서고, 가르고, 구분하는 벽이 아닙니다. 열고, 이어주고, 밝혀주는 벽입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살펴 어루만지는 ‘등불’ 같은 벽. 세상에는 그런 벽도 있습니다.
신륵사가 벽절로 불리게 된 까닭은 한강과 맞닿은 도량 남쪽 구릉에 다층전탑(보물)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을 본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벽절’이라는 말을 입에 붙였습니다. 이 탑은 고려 시대에 세워졌습니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바뀌면서 도읍 또한 경주에서 개경으로 바뀌었고, 한강 뱃길은 더없이 요긴해졌습니다. 한강 수운을 통해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나르게 된 것입니다.
여주 지역을 관통하는 남한강을 특별히 ‘여강’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신륵사 전탑 어름에서는 강굽이가 심하게 휘어집니다. 큰물이 지는 때는 물결이 크게 요동쳐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신륵사 전탑은 ‘등대’ 역할을 했고, 신륵사는 뱃길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안심의 벽절’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신륵사는 고려 때의 벽절이 아닙니다. 한강 역시 뱃길로서의 구실을 놓은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벽절이 필요합니다. 인생이라는 강물은 무시로 사나워지기 때문입니다.
신륵사 산문에 들자 은행나무 가로수가 길을 열어줍니다. 그 옆으로는 느티나무가 동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불이문을 지나자 굴곡진 소나무가 하늘을 화선지 삼아 골기 서늘한 묵화를 그려 보입니다. 한강 가 언덕에는 막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 같은 지붕을 인 정자가 서 있습니다. 거기 올라가 앉았습니다. 한강물이 눈에 너울지고 둔치의 느티나무가 강바람을 잡았다 풀어놓으며 넌지시 소매를 잡아당깁니다.
신륵사 전탑 앞 강월헌에서 ‘물멍 삼매’에 빠진 사람들
신륵사 앞마당의 참나무. 수령이 600년을 훌쩍 넘었다.
신륵사 앞 한강 물가 언덕의 느티나무
‘물멍’ 하기 좋은 한강과 한몸을 이룬 절
한강과 한몸을 이룬 절 앞마당엔 600세 넘은 은행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 높이와 품의 넓이는 능히 하나의 숲을 감당할 만합니다. 막무가내로 푸르고 푸른 1년생 나무 600그루를 몸에 지닌, 나이가 지워진 듯 곱게 늙은 거목입니다. 그 나무의 그늘을 걸어 전탑으로 가서 한 바퀴 탑돌이를 하고 강월헌에 앉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경탄할 만한 언어 감각이 빚은 ‘물멍’을 하기에 딱 좋은 자세가 나옵니다.
절 북서쪽 뒤편 조사당 옆 부도 옆으로 봉미산 자락을 오릅니다. 시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크게 반원을 그리며 절을 감싸는 숲길입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숲속에 들어온 느낌으로 충만합니다.
신륵사는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 하나 믿을 만한 근거는 없고, 고려 말 나옹 스님(1320~1376)이 이곳에서 열반함으로써 사격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신륵사 일주문을 나서면서 꼭 들어야 할, 아니 저절로 듣게 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水如風而終我)
나옹 스님이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노래입니다. 나옹 스님의 그 노래를 들려주려고 신륵사는, 한강을 곁에 두고 숲과 나무를 기르며 거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