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평생 

봄을 찾아 헤맨 

승려의 이야기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600여 년 전 친구를 떠올린다 

마흔아홉의 설잠(雪岑)이 또 찾아왔다. 그 친구를 요즘 사람들은 매월당(梅月堂)이라고도 하더라. 

나는 고려 초기에 태어났고, 그 친구는 조선 시대 사람이나, 숫자는 무용했다. 

나는 그를 친구, 도반이라 생각하곤 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가로챘을 때, 시대의 슬픔과 두려움에 사무처 승려가 되었던 천재. 

나이 21세에 이미 세상 지식을 꽤나 머리에 담았는데 도리에 역행하는 새 임금의 시대가 너무도 안타까워 스스로 속세를 떠나 전국 유랑을 시작했다. 법명은 설잠(雪岑), ‘눈 쌓인 봉우리’라는 뜻이었다. 고독하고 지독히 외로운 겨울의 산봉우리. 그래서 내가 본 그는 따뜻하게 꽃 피고 새 우는 봄의 경계선, 가장 먼저 매화가 피는 달밤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21세에 전국 유랑을 다니다 추암 촛대바위 앞에 서서 파도치는 바다의 일출을 바라보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28년을 걷고, 걸어서 49세 노인이 되어 그 일출을 또 바라보고 있었다. 

봄은 언제 오는가 고민하는 노인의 뒷모습이었다.




도반이 좋아했던 파도, 두타산, 삼화사, 그리고 나  

내 앉은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매일 해가 떠오른다. 15km 정도 앞, 동해가 펼쳐지는 추암 촛대바위에 해가 떠오를 때면 내가 있는 ‘두타산’ 무릉계곡에 잠자던 용이 잠에서 깨어나듯 학소대와 용추폭포, 쌍폭포까지 거대한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두타산을 그는 좋아했다. 21세에 승려가 되어 이곳에 왔을 때에도, 서울로 가서 효령대군의 일을 도울 때에도, 37세에 서울에서 농사짓고 살 때도, 47세에 환속해 아내 안 씨를 맞았을 때에도, 그리고 2년 후 다시 ‘바랑(승려가 등에 지고 다니는 배낭)’을 메고 방랑의 길에 접어들어 유랑하다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그는 동해에 오면 꼭 추암 촛대바위 앞에서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두타산을 타고 올라,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동해 삼화사 적광전의 철조노사나불 

설잠이 앉는 삼화사 적광전 자리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설잠이 죽고 한참 후에 임진왜란이 나서 전각들이 약사전만 빼고 모두 탄 적도 있었고, 조선 순조(1800~1834) 시절에는 산불이 나서 적광전이 다 타고 철로 만든 나만 남았을 때 도둑이 들어 나를 훔쳐 달아나다가 호랑이가 나타나 사자후를 뿜어 나를 놓고 도망간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1905년에는 삼척 지방 의병들이 삼화사를 거점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200여 칸 모든 전각을 일제가 불태운 적도 있었다. 

몸이 있으면 생로병사를 겪어야 하니, 절의 수명은 다했으나 법맥은 이어졌고,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의 원력으로 1979년 8월에 삼화사는 무릉계곡 위쪽, 지금의 자리에 중건되었다. 그리고 수난 속에 나는 그나마 철로 만들어진 노사나불이었기에, 머리와 상반신 몸뚱아리만 남았었는데, 1997년 복원 불사하면서 내 몸은 하반신까지 온전해져 아침마다 동해의 파도와 추암 촛대바위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동해 삼화사의 적광전에 앉은 본존상,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이다.


평생 꽃을 찾아, 봄을 찾아 헤맨 승려의 이야기

나는 그저 친구의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나의 미소를 알아본 것은 그다. 

파도는 그저 밀려오고, 물러나고를 반복했을 뿐이다. 파도의 의미를 알아본 것도 그다. 

다만 그가 21세에 여기서 느낀 것이 ‘다시 찾아 떠나보자’는 것이었다면, 49세에 나를 찾아온 다음 그는 부여의 무량사로 가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다르다. 

가끔, 나는 나름대로 그 차이를 짐작하며 미소 짓는다. 

바랑을 멘 그는 수행자였고,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내 앞에 서면 그는 늘 무장해제되었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공(空)했다. 

내가 말했다. 

“어느 비구니가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녀도 봄을 찾을 수 없었다. 짚신이 다 닳도록 꽃을 찾아, 봄을 찾아 헤매었는데, 지쳐서 돌아와 우연히 뒤뜰을 보니 매화꽃이 거기 피어 있었다.” 

49세의 설잠은 조용히 적광전 열린 문 너머 절 마당을 바라보다, 미소를 짓고 떠났다. 

그렇다. 

이미 너는, 봄이다.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