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수정사 대광전 석조 아미타 삼존여래좌상|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2024-08-09
그 남자 이야기
의성 수정사 대광전 석조 아미타 삼존여래좌상
막바지 여름비가 내려 계곡물이 불었다. 아마도 추석이 되면 금성산 아래 사하촌은 풍년의 노래를 부르리라.
나는 이 시기가 되면 그 사람 생각이 난다. 아무도 본 적은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본 그 사람.
한반도 최고(最古) 화산 – 죽음을 생명으로 만든 ‘금성산’
여기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내가 들어앉은 금성산은 이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으로 불린다. 금성산은 화산활동을 멈춘 사화산(死火山)이다. 하지만 죽은 화산에 기품이 넘치는 것은 수만 년 수많은 생명이 산 위를 덧칠하고, 수많은 인간이 길을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환으로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엔 불문율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금성산 산꼭대기에 조상 묘를 쓰면 만석꾼이 되지만, 산 아래 마을에는 3년 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다.
올해도 계곡물이 불어난 것을 보면, 지역민들이 이 산을 얼마나 성스러운 터전으로 지켜가고 있는지 느껴진다.
전설 속 만석꾼이 되고 싶어 조상 묘를 옮긴 남자
하지만 전설의 만석꾼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가 있었다. 내가 이 천년 고찰 수정사 대광전에 앉아 그를 보았던 시기는 어림잡아 90년쯤 된 것 같다. 수정사는 신라 신문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불에 타기도 하고, 다시 중수되기도 했다. 구담 선사, 지능 선사, 월산 스님, 탄허 스님 등 한국 불교 역사에 획을 그은 선사들이 이 작은 절집, 수정사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50대 중반, 몰락한 양반가의 남자였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있던 그 시절, 그는 양반 체면에 재산을 빼앗기긴 해도, 그렇다고 친일을 할 수는 없는… 두려움 많은 양반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집안을 다시 살려라’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는 그 짓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위인이었다. 하지만 욕심은 났다. 만석꾼이라니…!
그는 아버지의 무덤을 선산에 묻고, 삼우가 되기 전,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정해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 묘를 파서 전설 대로 금성산 꼭대기에 묻었다. 선산의 묘는 비어 있었지만, 주인이 있는 척해놓아 감쪽같았다. 혼자 묘를 파고, 옮기고, 꼭대기에 묻은 아버지 시신을 짐승이 물어 갈까 깊이 파묻고, 돌무더기로 덮어놓은 뒤 집에 돌아올 즈음 장대비가 쏟아졌다. 온몸의 땀이 장대비에 식으면서 그의 몸은 한 마리 짐승처럼 콧김을 내뿜었다. 계곡물에 웅크린 채 손톱 사이 까맣게 낀 흙무더기들을 빼내며 울고, 또 울었던 그 남자가 나는 내심… 안쓰러웠다.
가뭄과 흉년, 그리고 민심과 그 남자
비는 그쳤다. 그냥 그친 것이 아니라 정말 오지 않았다. 가뭄이 이어지며 흉년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산꼭대기를 찾아봐야 한다”, “누군가 조상 묘를 몰래 쓴 게 틀림없다”, “누가 부자가 됐나 찾아서 범인을 색출해야 한다.”
거짓말처럼 그는 부자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세울 수 없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자식들에게 고기를 먹이고 싶었지만 처지를 아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돌까 두려워 돈이 생겨도 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 잔치에서 마을 대표가 발표했다.
“보름쯤 전에 산꼭대기에서 이름 없는 묘를 발견해, 마을 남자들이 합심해서 산 밑으로 내동댕이쳤으니, 이제 가뭄이 끝나고 풍년이 올 것입니다!”
대광전 좁은 돌계단과 돌무더기를 쌓아 올린 사람
그날 이후, 남자는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금성산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마을에는 다시 비가 내리고, 풍년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기쁨도 슬픔도 내보일 수 없었던 그의 집안은 다시 기울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자는 홀로 남았다. 그런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한 일은 내가 있는 대광전에 닿는 돌계단을 3년 동안 쌓은 일이다. 아무도 무너트리지 못하도록 그는 좁고 긴 돌계단 옆에 돌무더기도 쌓아 올렸다. 피가 나고 손톱이 으깨지도록 돌계단을 쌓는 동안 수정사를 오가는 많은 이들이 그를 보았건만, 그가 누구인지,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억하는 이는 없다.
한순간의 욕심, 그리고 민중의 단죄, 그 후에 이어진 눈물과 후회.
전설로 남아버린 그 사람의 인과를 여름비 오는 절 마당을 바라보며 기억해본다.
나는 의성 수정사 대광전에 앉아 있는
‘석조 아미타 삼존여래좌상’ 중 가운데, 아미타불이다.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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