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으뜸가는 가람, 직지사
직지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로 보물 제670호 삼존불 탱화가 모셔져 있다. 그 앞의 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단층 기단 위의 단아한 3층 정형탑이다.
이 탑은 원래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 절터에 있던 것을 1974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경상북도김천시에있는황악산직지사는고구려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이, 경순왕 4년(930)에는 천묵이중수하고, 태조 19년(936)에 능여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광해군 2년(1610)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직지사는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현재도 990여㎡가 넘는 거대한 천불선원(千佛禪院)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수선도량(修禪道場)이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3층 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3층 석탑(보물 제607호), 대웅전 삼존불탱화 3폭(보물 제670호), 청풍료(淸風寮) 앞 3층 석탑(보물 제1186호)등의 문화재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주문, 사천왕문, 비로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던 사찰은 삼국시대의 본래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대웅전 삼존불뒤에 걸린 삼존불탱화와 약사전의 석조약불좌상 등 수많은 보물과 성보박물관을 갖추고 있다. 삼존불 뒤에 길게 걸린 후불탱화는 한참 동안 음미할 만하다. 모두 길이가 6m가 넘는 3점의 후불탱화는 영조 20년(1744)에 그려졌다. 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세부 묘사도 치밀해 조선 후기 불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사람들의 가장 많은 시선을 받는 전각은 1,000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이다. 현세의 고통을 신도들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한다는 수많은 부처님으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이라 더욱 신비하다.
이 천불상은 고려 초 능여대사가 비로전을 지을 때 속리산의 경잠 스님을 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법당 하나 가득 앉아 있는 불상들 속에 벌거벗은 동자의 모습을 한 불상이 서 있다. 법당에 들어설 때 이 불상을 가장 먼저 보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천불상을 안치한 까닭에 천불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직지사는 교리적으로 따진다면 선가(禪家)의 가풍을 적실하게 드러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는 말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감천은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의 경계에 있는 수도산(修道山) 부근 우두령에서 발원해 김천시 전체를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대체로 화강암 지역이어서 강바닥에 모래가 많다.
한편으로는 직지사 창건주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짓고 나서 손을 들어 멀리 서쪽의 산 하나를 곧게(直) 가리키며(指) “저 산 아래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했으며 그 산과 절이 황악산이고 직지사라는 것이다. 또 고려 태조 때 이 절을 중창한 능여대사가 큰 불사를 하면서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가늠해 일했으며, 절 이름도 여기서 생겼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 줄곧 큰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였지만 임진왜란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맞았다. 더욱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왜병들의 혹독한 보복을 받았다.
그 뒤 여러 차례 손을 보아 사세를 회복해가던 직지사는 조선의 국운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으며 근대까지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하다 1960년대 이래 옛 사격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30년간에 걸친 복원불사를 거치며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김천 지역의 포도 농장. 강우량이 적고 추풍령을 기점으로 일교차가 크며 감천과 직지천의 맑은 물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고품질의 포도가 생산된다.
또 수확 시기의 만부병, 열과를 줄이기 위해 재배 면적의 90% 이상이 비가림 시설로 되어 있어 비닐하우스의 바다처럼 보인다.
직지사는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절에서 김천까지는 12km이고, 김천에서 서울까지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길상지지(吉祥之地)로 평가된다.
글|이민(자유기고가), 사진|신병문(다큐멘터리 항공사진작가)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으뜸가는 가람, 직지사
직지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로 보물 제670호 삼존불 탱화가 모셔져 있다. 그 앞의 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단층 기단 위의 단아한 3층 정형탑이다.
이 탑은 원래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 절터에 있던 것을 1974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경상북도김천시에있는황악산직지사는고구려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이, 경순왕 4년(930)에는 천묵이중수하고, 태조 19년(936)에 능여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광해군 2년(1610)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직지사는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현재도 990여㎡가 넘는 거대한 천불선원(千佛禪院)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수선도량(修禪道場)이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3층 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3층 석탑(보물 제607호), 대웅전 삼존불탱화 3폭(보물 제670호), 청풍료(淸風寮) 앞 3층 석탑(보물 제1186호)등의 문화재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주문, 사천왕문, 비로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던 사찰은 삼국시대의 본래 모습은 찾기 힘들지만 대웅전 삼존불뒤에 걸린 삼존불탱화와 약사전의 석조약불좌상 등 수많은 보물과 성보박물관을 갖추고 있다. 삼존불 뒤에 길게 걸린 후불탱화는 한참 동안 음미할 만하다. 모두 길이가 6m가 넘는 3점의 후불탱화는 영조 20년(1744)에 그려졌다. 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세부 묘사도 치밀해 조선 후기 불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사람들의 가장 많은 시선을 받는 전각은 1,000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이다. 현세의 고통을 신도들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한다는 수많은 부처님으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이라 더욱 신비하다.
이 천불상은 고려 초 능여대사가 비로전을 지을 때 속리산의 경잠 스님을 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법당 하나 가득 앉아 있는 불상들 속에 벌거벗은 동자의 모습을 한 불상이 서 있다. 법당에 들어설 때 이 불상을 가장 먼저 보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천불상을 안치한 까닭에 천불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직지사는 교리적으로 따진다면 선가(禪家)의 가풍을 적실하게 드러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는 말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감천은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의 경계에 있는 수도산(修道山) 부근 우두령에서 발원해 김천시 전체를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대체로 화강암 지역이어서 강바닥에 모래가 많다.
한편으로는 직지사 창건주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짓고 나서 손을 들어 멀리 서쪽의 산 하나를 곧게(直) 가리키며(指) “저 산 아래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했으며 그 산과 절이 황악산이고 직지사라는 것이다. 또 고려 태조 때 이 절을 중창한 능여대사가 큰 불사를 하면서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가늠해 일했으며, 절 이름도 여기서 생겼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 줄곧 큰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였지만 임진왜란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맞았다. 더욱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왜병들의 혹독한 보복을 받았다.
그 뒤 여러 차례 손을 보아 사세를 회복해가던 직지사는 조선의 국운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으며 근대까지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하다 1960년대 이래 옛 사격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30년간에 걸친 복원불사를 거치며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김천 지역의 포도 농장. 강우량이 적고 추풍령을 기점으로 일교차가 크며 감천과 직지천의 맑은 물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고품질의 포도가 생산된다.
또 수확 시기의 만부병, 열과를 줄이기 위해 재배 면적의 90% 이상이 비가림 시설로 되어 있어 비닐하우스의 바다처럼 보인다.
직지사는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절에서 김천까지는 12km이고, 김천에서 서울까지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길상지지(吉祥之地)로 평가된다.
글|이민(자유기고가), 사진|신병문(다큐멘터리 항공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