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초의 불탑, 산치 대탑 | 각전 스님의 부처님 성지 순례

산치 대탑
- 인도 최초의 불탑에서 부처님 전생과 현생을 만나다

베산타라 본생(추방당하는 베산타라 왕). 북문 가로 들보 앞면

불탑은 불자들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
부처님 반열반 후에 탑을 조성하라는 말이 『대반열반경』에 등장한다. 부처님께서 자신의 다비를 할 때 전륜성왕에 준해서 하되 법구(法具)를 황금관에 넣어 다비하고 그 사리를 수습해서 도시의 네 거리에 탑을 세우라고 해둔 것이다.

탑은 스투파에서 온 말인데, 스투파는 흙을 쌓아 올린 것이라는 뜻이다. 유골을 묻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기념하던 관행이 불교에 수용되어 불멸 직후 근본 8탑이 생기고, 아소카 왕 때 이를 열어서 인도 전역에 8만 4,000 탑을 세웠다고 하며, 그 후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탑들이 생겨났다.
북문 약사상

서문 약사상

불상도 없고, 불경도 없던 시절에 부처님의 유골을 간직한 탑은 불자들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고, 세계적인 불교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불탑이 인도에서 시작되었고, 인도의 불탑 중에서도 최초의 불탑이 산치 대탑이다. 산치 마을의 90m 높이의 사암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 산치 대탑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13세기 이후 잊혔다가 1912년 존 마셜(Marshall)의 영국 발굴팀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1987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본래 8탑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3탑만 남아 있다. 그중 제1탑이 아소카왕이 웃자인(Ujjain) 지방의 총독으로 있던 시절 결혼한 데비 왕비가 죽은 뒤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이후 B.C.E. 2세기 숭가 왕조 때 크게 증축되었고, 기원후 1세기경인 사타바하나 왕조 시대에 남북동서의 순서로 탑문이 조성되었다. 탑문 안쪽에 조성된 불상은 굽타 시대의 것이다.

최초의 불탑, 산치 대탑
1탑의 서쪽 아래 언덕바지에 위치한 2탑에서는 아소카왕 시대 10명의 고승 사리가 발견되었다. 1탑의 북동쪽에 위치한 3탑은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그 외 주변부의 사원 유적들이 여럿 있고 후기의 밀교적 흔적도 남아 있다.

산치 대탑은 최초의 불탑이라는 점에서 양식적 측면을 간단히 보면, 반구형 돔(전체 높이 16.4m, 지면과 맞닿은 지름 36.5m) 위에 찰주(刹柱), 산개(傘蓋), 평두(平頭)가 올려져 있고, 돔 주위로 난순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남북동서에 네 문을 설치한 모습이다.

반구형 돔은 안다(aṇḍa)라고 하며, 복발(覆鉢)로 번역하고, 그 의미는 알이다. 안다의 꼭대기에 찰주와 산개를 두고, 이를 작은 울타리인 평두가 싸고 있다. 찰주는 우주목 신화에서 세계축의 의미를 지닌다. 찰주의 수직 중앙선을 따라서 사리기를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치 대탑은 탑문의 아름다움이 압권일 뿐만 아니라 탑문에 새겨진 부조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먼저 탑문의 모양을 보면, 두 기둥 간 간격을 2.15m로 해서 한 면이 두께가 0.68m인 기둥을 약 10m까지 세워 올리고, 두 기둥 간에 세 개의 가로 들보를 횡으로 연결한 모습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현충문을 굵고 두꺼운 석조물로 만든 모양새와 같다.
베산타라 본생(자식과 부인 보시) (북문, 가로 들보 뒷면 1층)

해학성과 소박함, 아름다움을 간직한 탑문의 부조들
다음으로 부조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자. 탑문에 새겨진 아름다운 부조들은 아잔타 석굴의 벽화와 마찬가지로 네 가지 범주이다. 불상징도(7.4%), 부처님 일대기(56.8%), 본생담(12.3%), 아소카왕도(6.2%)가 그것이다(중심 면의 총 81점 대비 수치임). 불상징도와 이 세 가지 범주의 내용도가 탑문의 가운데 내지 안쪽인 중심 면에 새겨졌다. 탑문의 주변부는 나머지 상징도들로 장식되었다. 알의 주인이 남긴 사자후를 탑문에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조각들은 생동감 넘치면서도 사실적이며, 해학성과 소박함마저도 간직하고 있는 작품들로서 인도 조각의 백미이다.
서문 뒷면
동문쪽 전경

전시회에 가면 대형 작품이 눈길을 끌 듯, 24점의 가로 들보 면의 대형 부조는 탑문 부조의 백미이다. 태양빛이 강한 남문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여의덩굴도를, 사문유관 시에 사문을 만난 북문에는 항마성도도(降魔成道圖)를, 부처님께서 동문으로 출가하셨기 때문에 동문에는 유성출가도(逾城出家圖)를, 해가 저무는 서문에는 사리분배도를 초전법륜도와 찬탄항마도와 함께 위치시켜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부처님 일대기의 작품들의 위치가 주로 중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 자리인 가로 들보 바깥 면의 2층과 안쪽 면이다. 주제의 범위도 출가, 성도, 초전법륜, 열반에 국한되고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 수가 약간 적은 본생담이 가장 중요한 위치인 가로 들보 1층 바깥 면에 두 점(북문과 서문)이 새겨져 있다. 특히 북문에는 1층 가로 들보의 앞뒷면에 걸쳐 베산타라 본생도가 새겨졌고, 그 2층 가로 들보 안쪽 면에 항마성도도가 위치하고 있다.

베산타라 본생은 부처님께서 사람 몸을 받은 마지막 생으로서 보시바라밀로써 자신의 공덕행을 완성하신 생이다. 부처님은 이생에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집에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보시를 하고자 합니다” 하고 말했다고 하며, 백성들에 의해 왕국에서 추방될 때조차 자신을 추방한 백성들에게 보시하기 좋은 물건들을 700개씩 보시하는 대보시(sattasatakamahādāna)를 행했고, 숲에 추방된 상태에서 아들과 딸, 부인마저 보시하셨다. 이때 땅이 여섯 갈래로 진동하였다고 한다.
북문쪽 전경

부처님의 전생과 현생을 아름다운 부조로 표현한 산치 대탑
베산타라왕의 생을 마지막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로 태어난 부처님께서는 지고한 무색계 선정도 마다하고, 6년간의 혹독한 고행도 무의미함을 느끼고, 보리수 밑 금강좌에 앉으셨다. 마왕과 그 군대가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 공격들은 과거생의 바라밀 공덕의 위력으로 꽃과 향과 광명으로 바뀌고, 베산타라왕 때 행한 700대 보시와 두 자녀와 부인 맛디를 보시한 위력에 의해 마왕과 그 권속들은 입고 있던 옷가지도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도망가버리게 된다.

이것이 베산타라왕의 생에서의 보시바라밀과 부처님께서 성도 직전 마군을 항복받는 장면의 인과관계이다. 부처님의 출현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도를 이루신 것은 마군을 항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마군을 항복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앞 전생에 보시바라밀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산치 대탑 북문의 탑문 부조가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산치 대탑은 원시적 반구형 돔의 모양을 하고 있음으로써 불탑의 원형적 모습을 알게 해주는 동시에, 탑문의 아름다운 부조를 통해 부처님의 전생과 부처님의 현생과 부처님께서 전하시고자 한 뜻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글과 사진|각전 스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39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해양수산부에 근무하다가 궁극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출가했다. 현재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저서에 『인도 네팔 순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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