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무아, 윤회에
대한 바른 이해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연기와 무아의 쉬운 실천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연기법(緣起法)과 무아(無我)를 말한다. 세상 모든 것들, 삼라만상은 전부 인과 연이 화합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 거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는 것 또한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 고정된 실체적인 자아를 찾아볼 수 없어서 무아다.
우리는 저 바깥의 물질세계나 자연계는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실체도 없고, 영혼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람만은 다르다고 확신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어서 특별하다고 여긴다. 사람은 너희들 동물, 자연, 식물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연기법과 무아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선불교에서도 참나, 자성, 본래면목을 설하지만, 그것은 다 방편일 뿐 본래무일물이며, 그런 말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라고 설한다.
이 몸과 마음, 이 육신이 저 바깥의 나무, 빌딩, 바람, 구름, 태양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르다고 여기는 한 생각, 저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과 다른 ‘나’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아상(我相)이고 에고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 오온무아(五蘊無我)를 설하셨다.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붙잡아 집착할 것인가?
나를 확장하고, 나를 내세우고, 내가 잘나고, 내가 대단해지며, 능력도 생겨나고, 돈도 벌고, 칭찬받는 그런 허망한 일들을 꾸며내는 것만이 이 한생을 가장 잘 사는 일이라고 자위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허망해지지 않는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저 이렇게 인연 따라 세상은 작용되고 있을 뿐이다.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마치 꿈처럼.
다만 사람이 생각, 의식, 알음알이, 분별심을 일으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잘난 나를 만들고, 욕심을 채우는 나를 만드는 등 스스로 나와 세상을 의식으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러한 생각으로 만드는 허망한 착각의 세계를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세상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인연 따라 오고 가는 모든 것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오고 가도록 허용해주라. 내가 거기에 시비를 걸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나는 없으니.
나와 세상이라는 분별이 없다
분별없이 바라보게 되면 다만 ‘볼 뿐’이지,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나누는 분별도 쉬게 된다. 그저 볼 뿐, 내가 대상을 본다는 분별이 없다. 나와 경계를,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나와 세상을 나누지 않고 동체(同體)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나와 다르지 않다.
어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내가’, ‘생각’을 한다고 여기면서, 나와 생각을 둘로 나누어놓는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하는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없이 보면, 그저 하나의 생각이 인연 따라 불쑥 일어났다가 사라졌을 뿐이지, 나와 생각이 둘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는 나를 떠나 생각되는 것은 없고, 생각되는 것을 떠나 생각하는 나는 없다. 그 둘은 언제나 동시생 동시멸이며, 둘이 아닌 하나다. 연생(緣生), 즉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그런데 연생은 무생(無生)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사실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겨나되 생겨난 바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뜻한다. 그래서 연기(緣起)는 곧 무아(無我)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생겨났지만 생겨난 바가 없다. 인연생 인연멸로 인연가합, 즉 인연이 거짓으로 화합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생겨나되 생겨난 바가 없는 것이다.
윤회에 대한 견해가 없다
어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 과거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전생도 있다.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내생도 있다. 과거와 미래는 생각 속에서만 있다. 그러니 윤회도 생각 속에서만 있다.
어제가 없고 내일이 없는데, 전생이나 다음 생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 속에서는, 중생들의 분별된 삶에는 분명 윤회도 있고, 어제와 내일도 있다. 그러나 중생들의 생각 속에서 벗어나, 분별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이라는 참된 진실로 돌아와보라.
지금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당신은 생각할 때만 과거와 미래를 경험할 수 있다. 생각이 없으면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그저 맨느낌으로 경험할 뿐이지, 과거나 미래가 붙을 수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눈앞에 어떤 한 물건을 만나면, 곧장 그것을 과거에 경험 속에서 만났던 그것과 비슷한 물건을 생각해내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과거의 물건과 비교한다. 비교함으로써 과거로 끌려들어가고, 생각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저 지금 눈앞을 과거로 투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을까? 그랬을 때 무엇이 있는가? 지금 이대로만이 있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을 뿐이다. 그 어떤 해석, 판단, 분별없이 그저 이렇게 있다. 이 자리에는 과거도 미래도 윤회도 없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윤회는 있을까? 없을까? 중생의 생각에는 있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분별 너머에는 없으니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윤회, 과거, 미래 등 허망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중도적인 관점이다.
있다거나 없다라고 단정 짓지 말라. 단정 짓거나 확정 지으면, 그것은 믿거나 믿지 않을 하나의 견해로 굳어진다. 불법에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정해진 법이 따로 없다. 정해진 견해가 없다. 불교의 견해에는 윤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불교는 윤회에 대한 견해가 없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견해도 없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상 스님|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6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
연기, 무아, 윤회에
대한 바른 이해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연기와 무아의 쉬운 실천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연기법(緣起法)과 무아(無我)를 말한다. 세상 모든 것들, 삼라만상은 전부 인과 연이 화합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 거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는 것 또한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 고정된 실체적인 자아를 찾아볼 수 없어서 무아다.
우리는 저 바깥의 물질세계나 자연계는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실체도 없고, 영혼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람만은 다르다고 확신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어서 특별하다고 여긴다. 사람은 너희들 동물, 자연, 식물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연기법과 무아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선불교에서도 참나, 자성, 본래면목을 설하지만, 그것은 다 방편일 뿐 본래무일물이며, 그런 말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라고 설한다.
이 몸과 마음, 이 육신이 저 바깥의 나무, 빌딩, 바람, 구름, 태양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르다고 여기는 한 생각, 저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과 다른 ‘나’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아상(我相)이고 에고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 오온무아(五蘊無我)를 설하셨다.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붙잡아 집착할 것인가?
나를 확장하고, 나를 내세우고, 내가 잘나고, 내가 대단해지며, 능력도 생겨나고, 돈도 벌고, 칭찬받는 그런 허망한 일들을 꾸며내는 것만이 이 한생을 가장 잘 사는 일이라고 자위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허망해지지 않는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저 이렇게 인연 따라 세상은 작용되고 있을 뿐이다.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마치 꿈처럼.
다만 사람이 생각, 의식, 알음알이, 분별심을 일으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잘난 나를 만들고, 욕심을 채우는 나를 만드는 등 스스로 나와 세상을 의식으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러한 생각으로 만드는 허망한 착각의 세계를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세상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인연 따라 오고 가는 모든 것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오고 가도록 허용해주라. 내가 거기에 시비를 걸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나는 없으니.
나와 세상이라는 분별이 없다
분별없이 바라보게 되면 다만 ‘볼 뿐’이지,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나누는 분별도 쉬게 된다. 그저 볼 뿐, 내가 대상을 본다는 분별이 없다. 나와 경계를,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나와 세상을 나누지 않고 동체(同體)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나와 다르지 않다.
어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내가’, ‘생각’을 한다고 여기면서, 나와 생각을 둘로 나누어놓는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하는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없이 보면, 그저 하나의 생각이 인연 따라 불쑥 일어났다가 사라졌을 뿐이지, 나와 생각이 둘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는 나를 떠나 생각되는 것은 없고, 생각되는 것을 떠나 생각하는 나는 없다. 그 둘은 언제나 동시생 동시멸이며, 둘이 아닌 하나다. 연생(緣生), 즉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그런데 연생은 무생(無生)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사실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겨나되 생겨난 바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뜻한다. 그래서 연기(緣起)는 곧 무아(無我)다.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생겨났지만 생겨난 바가 없다. 인연생 인연멸로 인연가합, 즉 인연이 거짓으로 화합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생겨나되 생겨난 바가 없는 것이다.
윤회에 대한 견해가 없다
어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 과거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전생도 있다.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내생도 있다. 과거와 미래는 생각 속에서만 있다. 그러니 윤회도 생각 속에서만 있다.
어제가 없고 내일이 없는데, 전생이나 다음 생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 속에서는, 중생들의 분별된 삶에는 분명 윤회도 있고, 어제와 내일도 있다. 그러나 중생들의 생각 속에서 벗어나, 분별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이라는 참된 진실로 돌아와보라.
지금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당신은 생각할 때만 과거와 미래를 경험할 수 있다. 생각이 없으면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그저 맨느낌으로 경험할 뿐이지, 과거나 미래가 붙을 수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눈앞에 어떤 한 물건을 만나면, 곧장 그것을 과거에 경험 속에서 만났던 그것과 비슷한 물건을 생각해내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과거의 물건과 비교한다. 비교함으로써 과거로 끌려들어가고, 생각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그저 지금 눈앞을 과거로 투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을까? 그랬을 때 무엇이 있는가? 지금 이대로만이 있다. 이와 같고 이와 같을 뿐이다. 그 어떤 해석, 판단, 분별없이 그저 이렇게 있다. 이 자리에는 과거도 미래도 윤회도 없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윤회는 있을까? 없을까? 중생의 생각에는 있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분별 너머에는 없으니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윤회, 과거, 미래 등 허망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중도적인 관점이다.
있다거나 없다라고 단정 짓지 말라. 단정 짓거나 확정 지으면, 그것은 믿거나 믿지 않을 하나의 견해로 굳어진다. 불법에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정해진 법이 따로 없다. 정해진 견해가 없다. 불교의 견해에는 윤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불교는 윤회에 대한 견해가 없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견해도 없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상 스님|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6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