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인도기행』을 함께 추천하며
정여울 작가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민음사 刊, 2002
◦ 헤세의 싯다르타와 고타마 싯다르타는 다르다
헤세의 싯다르타와 고타마 싯다르타는 매우 다르다. 우리가 흔히 ‘부처님’이라 부르는 고타마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비범한 출생) 파란만장한 간난신고를 겪고 영웅적 존재가 되었다면, 헤세의 싯다르타는 평범한 인간에서 출발해 깨달음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을 걸어간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우리 독자들이 훨씬 더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인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아주 멀리서도 알았던 것과 달리, 헤세의 싯다르타는 결혼한 적이 없으며 연인 카말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에 가까웠지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을 닮았다.
그런데 나는 헤세의 싯다르타가 지닌 이 모름과 부족함, 연약함에 오히려 깊이 이끌린다. 아들을 ‘라후라’, 즉 방해자라고 여겼던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헤세의 싯다르타는 아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헤세의 싯다르타’가 지닌 못 말리는 연약함이 바로 이것이다. 그 연약함이 오히려 매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연인 카말라를 통해 그토록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으나, 카말라가 한없이 주고 또 준 사랑의 깊은 의미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카말라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 아들이 자신의 핏줄임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불타는 사랑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느끼게 된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환덕 옮김, 범우사 刊, 2013
◦ 헤세의 『싯다르타』 속 바주데바의 재발견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새삼 감탄하는 대목은 바주데바라는 경이로운 캐릭터다. 20대 시절 『싯다르타』를 읽었을 때는 바주데바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저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에 지나지 않았다. 30대에 『싯다르타』를 다시 읽으니 비로소 바주데바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주데바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었던 젊은 싯다르타를 강 건너 저편의 도시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에 실패하고 자살할 위험에 빠져 있었을 때도 싯다르타를 구해주고, 의식주를 돌봐주고, 뱃사공이라는 생존의 기술까지 가르쳐준 사람 또한 바주데바였다. 이런 따스한 멘토야말로 싯다르타에게 필요한 스승이 아니었을까. 40대에 『싯다르타』를 또다시 읽으니 이제야 바주데바가 부처님의 현신임을 알 것 같다. 부처님은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에서처럼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원효대사가 만난 평범한 아낙네의 모습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불교에서 흔히 ‘보살’이나 ‘여래’라고 부르는 한없이 너그러운 존재의 현신이 바로 바주데바가 아닐까.
부처님이 본모습으로 설법을 할 때는 헤세의 싯다르타가 말을 듣지 않아, 어쩌면 부처님이 바주데바의 모습으로 변신해 헤세의 싯다르타에게 깨달음을 전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헤세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성격 중 하나가 ‘위대한 멘토에 대한 저항’인데,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위대함에 저항해 한동안 그를 외면하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위대함에 맞서며 수도원을 떠나 예술가가 되라는 그의 가르침에 저항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도, 골드문트도 결국 각각의 멘토, 즉 데미안과 나르치스의 삶에 아름답게 동화된다. 헤세의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고타마 싯다르타에 저항하며 ‘그의 가르침은 나와 맞지 않다’고 느끼는데, 결국 그가 깨달은 사랑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궁극적인 자비(慈悲)와 일치한다. 헤세의 다른 소설에서 멘토가 되는 존재가 나르치스나 데미안처럼 엄청난 비중을 지닌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던 것과 달리, 바주데바는 거의 엑스트라처럼 짧은 분량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그렇게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처럼 마치 잠시 스쳐 지나가는 행인1처럼 등장하는 바주데바의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깨달음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 않고 싯다르타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다. 바주데바라는 아름다운 인물의 탄생은 인도 여행을 통해(『인도기행』) 기존의 사유의 틀을 깨부순 헤세가 마침내 도달한 거장의 경지가 아닐까.
◦ 헤세가 그린 ‘보상 없는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
한편 고빈다와 아들로 대표되는 중생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오직 자기밖에 모르던 에고이스트였던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결별하는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고빈다의 한결같은 사랑도, 바주데바의 함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는 사랑도, 고향에서 아들 싯다르타를 기다리며 애태우고 있을 아버지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던 헤세의 싯다르타. 그는 마침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존재(친아들)’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을 통해 한꺼번에 깨닫는다. 사랑받지 못할지라도 오직 사랑을 베풀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이야말로 그가 온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가 아들에게 쉽게 사랑받았다면, 그저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들과 친해졌다면, 그는 이토록 커다란 고통(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아들에게 버려지는 아픔) 속에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지난한 여정을 겪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문전박대당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지이기에 버려지고,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아예 아버지의 얼굴 자체를 보지 않으려 하는 아들을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싯다르타는 마침내 궁극적인 사랑의 실체를 맛본다. 한없이 주고 또 주어도 멈출 수 없는 사랑. 절대로 되돌려 받지 못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자신은 부모님, 고빈다, 카말라, 바주데바로부터 받았지만 단 한 번도 갚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늙고 지친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이 바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얼굴’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을 얻는답시고 제멋대로 집을 나가 수십 년 동안 편지 한 통 하지 않는 싯다르타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의 얼굴. 그것이 바로 아들에게 버림받고도 아들을 결코 잊지 못해 한없이 그리워하는 자신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짓밟히고, 내쳐지고, 밀려나는 설움과 아픔을 통해, 싯다르타는 기브 앤드 테이크식의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한없이 주고 또 주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싯다르타』를 읽고 또 읽을 때마다, 헤세가 이런 ‘보상 없는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그려냈다는 데 감탄하곤 한다. 그는 아주 많이 사랑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아내들은 물론 세 명의 아들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전 세계의 독자들과 비평가들과 작가들에게도 사랑받는 세계적인 작가였던 그가, 끝내 가장 사랑을 갈구하던 존재로부터 버려지는 존재의 아픔을 그려냈다는 것은 어쩐지 놀랍고도 눈물겹다. 그는 지극히 풍요로워 보이는 상황 속에서의 결핍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노벨문학상도 받고 괴테문학상도 받은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존재의 공허를 알았던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사랑의 본질은 결코 ‘많은 사랑을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사랑받을 가능성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간절함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 안의 가장 열렬하고 간절한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당신을 가장 애타게 하는 바로 그 존재로부터 버려질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 가없는 사랑의 열정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싯다르타의 눈부신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정여울|작가. KBS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싯다르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인도기행』을 함께 추천하며
정여울 작가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민음사 刊, 2002
◦ 헤세의 싯다르타와 고타마 싯다르타는 다르다
헤세의 싯다르타와 고타마 싯다르타는 매우 다르다. 우리가 흔히 ‘부처님’이라 부르는 고타마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비범한 출생) 파란만장한 간난신고를 겪고 영웅적 존재가 되었다면, 헤세의 싯다르타는 평범한 인간에서 출발해 깨달음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을 걸어간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우리 독자들이 훨씬 더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인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아주 멀리서도 알았던 것과 달리, 헤세의 싯다르타는 결혼한 적이 없으며 연인 카말라가 아들을 낳은 것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에 가까웠지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을 닮았다.
그런데 나는 헤세의 싯다르타가 지닌 이 모름과 부족함, 연약함에 오히려 깊이 이끌린다. 아들을 ‘라후라’, 즉 방해자라고 여겼던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헤세의 싯다르타는 아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헤세의 싯다르타’가 지닌 못 말리는 연약함이 바로 이것이다. 그 연약함이 오히려 매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연인 카말라를 통해 그토록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으나, 카말라가 한없이 주고 또 준 사랑의 깊은 의미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카말라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 아들이 자신의 핏줄임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불타는 사랑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느끼게 된다.
헤르만 헤세 지음, 박환덕 옮김, 범우사 刊, 2013
◦ 헤세의 『싯다르타』 속 바주데바의 재발견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새삼 감탄하는 대목은 바주데바라는 경이로운 캐릭터다. 20대 시절 『싯다르타』를 읽었을 때는 바주데바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저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에 지나지 않았다. 30대에 『싯다르타』를 다시 읽으니 비로소 바주데바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주데바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었던 젊은 싯다르타를 강 건너 저편의 도시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에 실패하고 자살할 위험에 빠져 있었을 때도 싯다르타를 구해주고, 의식주를 돌봐주고, 뱃사공이라는 생존의 기술까지 가르쳐준 사람 또한 바주데바였다. 이런 따스한 멘토야말로 싯다르타에게 필요한 스승이 아니었을까. 40대에 『싯다르타』를 또다시 읽으니 이제야 바주데바가 부처님의 현신임을 알 것 같다. 부처님은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에서처럼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원효대사가 만난 평범한 아낙네의 모습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불교에서 흔히 ‘보살’이나 ‘여래’라고 부르는 한없이 너그러운 존재의 현신이 바로 바주데바가 아닐까.
부처님이 본모습으로 설법을 할 때는 헤세의 싯다르타가 말을 듣지 않아, 어쩌면 부처님이 바주데바의 모습으로 변신해 헤세의 싯다르타에게 깨달음을 전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헤세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성격 중 하나가 ‘위대한 멘토에 대한 저항’인데,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위대함에 저항해 한동안 그를 외면하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위대함에 맞서며 수도원을 떠나 예술가가 되라는 그의 가르침에 저항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도, 골드문트도 결국 각각의 멘토, 즉 데미안과 나르치스의 삶에 아름답게 동화된다. 헤세의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고타마 싯다르타에 저항하며 ‘그의 가르침은 나와 맞지 않다’고 느끼는데, 결국 그가 깨달은 사랑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궁극적인 자비(慈悲)와 일치한다. 헤세의 다른 소설에서 멘토가 되는 존재가 나르치스나 데미안처럼 엄청난 비중을 지닌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던 것과 달리, 바주데바는 거의 엑스트라처럼 짧은 분량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그렇게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처럼 마치 잠시 스쳐 지나가는 행인1처럼 등장하는 바주데바의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깨달음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 않고 싯다르타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다. 바주데바라는 아름다운 인물의 탄생은 인도 여행을 통해(『인도기행』) 기존의 사유의 틀을 깨부순 헤세가 마침내 도달한 거장의 경지가 아닐까.
◦ 헤세가 그린 ‘보상 없는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
한편 고빈다와 아들로 대표되는 중생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오직 자기밖에 모르던 에고이스트였던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결별하는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고빈다의 한결같은 사랑도, 바주데바의 함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는 사랑도, 고향에서 아들 싯다르타를 기다리며 애태우고 있을 아버지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던 헤세의 싯다르타. 그는 마침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존재(친아들)’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을 통해 한꺼번에 깨닫는다. 사랑받지 못할지라도 오직 사랑을 베풀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이야말로 그가 온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가 아들에게 쉽게 사랑받았다면, 그저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들과 친해졌다면, 그는 이토록 커다란 고통(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아들에게 버려지는 아픔) 속에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지난한 여정을 겪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문전박대당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지이기에 버려지고,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아예 아버지의 얼굴 자체를 보지 않으려 하는 아들을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싯다르타는 마침내 궁극적인 사랑의 실체를 맛본다. 한없이 주고 또 주어도 멈출 수 없는 사랑. 절대로 되돌려 받지 못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자신은 부모님, 고빈다, 카말라, 바주데바로부터 받았지만 단 한 번도 갚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늙고 지친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이 바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얼굴’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을 얻는답시고 제멋대로 집을 나가 수십 년 동안 편지 한 통 하지 않는 싯다르타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의 얼굴. 그것이 바로 아들에게 버림받고도 아들을 결코 잊지 못해 한없이 그리워하는 자신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짓밟히고, 내쳐지고, 밀려나는 설움과 아픔을 통해, 싯다르타는 기브 앤드 테이크식의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한없이 주고 또 주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싯다르타』를 읽고 또 읽을 때마다, 헤세가 이런 ‘보상 없는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그려냈다는 데 감탄하곤 한다. 그는 아주 많이 사랑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아내들은 물론 세 명의 아들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전 세계의 독자들과 비평가들과 작가들에게도 사랑받는 세계적인 작가였던 그가, 끝내 가장 사랑을 갈구하던 존재로부터 버려지는 존재의 아픔을 그려냈다는 것은 어쩐지 놀랍고도 눈물겹다. 그는 지극히 풍요로워 보이는 상황 속에서의 결핍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노벨문학상도 받고 괴테문학상도 받은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존재의 공허를 알았던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사랑의 본질은 결코 ‘많은 사랑을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사랑받을 가능성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간절함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 안의 가장 열렬하고 간절한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당신을 가장 애타게 하는 바로 그 존재로부터 버려질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 가없는 사랑의 열정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싯다르타의 눈부신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정여울|작가. KBS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