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의 정수, 화엄사상이란 무엇인가|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불교 경전 길라잡이
2024-02-27
화엄사상이란 무엇인가
『화엄경』
권탄준
금강대학교 불교인문학부 명예교수
『화엄경』의 사상과 화엄교학 사상
화엄사상이라고 하면 흔히 ‘불교철학의 정수’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화엄 사상이라는 말은 철학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엄 사상이란 말에는 『화엄경』의 사상은 물론 『화엄경』 연구를 중심으로 해서 체계화된 사상까지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화엄경』의 사상과 『화엄경』 연구를 중심으로 해서 체계화된 화엄교학 사상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화엄교학 사상은 비록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연구한 내용을 체계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화엄경』을 이해한 내용을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화엄 교학의 사상은 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화엄경』을 연구해 이해한 내용을 특색 있게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화엄교학 사상으로는 화엄사상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화엄사상의 본질적인 내용(혹은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엄경』의 교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와 『화엄경』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보살(菩薩)이었을 때의 수행을 본받아 지혜와 자비 등 부처님이 갖춘 덕(德)을 자각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보살사 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승불교 자체가 ‘중생에서 부처로’라고 하는 기본적이 고도 실천론적인 의도를 지니는 입장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대승경 전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 또한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화엄’이라고 하는 말은 꽃으로 장엄한다는 말인데, 식물의 아름다운 꽃에 비유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보살행을 실천해 부처님이 갖추고 계신 훌륭한 공덕을 스스로 갖추고, 주변에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꽃피워내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내용을 설하고 있는 『화엄경』은 이와 같은 대승사상에 입각해 웅대한 구상, 풍부한 비유와 상징, 그리고 심오하고 다양한 사상으로써 부처님의 세계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보살도를 설하는 경전으로 수많은 대승 경전 가운데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화엄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成道)하고 나서 곧바로 스스로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을 그대로 설한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근본법륜(根 本法輪)이라 일컬어졌다. 즉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초기 불교에서 보이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와 그것을 위해 수행 해온 사실을 충실히 이어받으면서도 이를 대승불교의 웅대하고도 실천적인 사상으로 문학적으로 훌륭히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의 세계는 두말할 필요 없이 깨달음의 세계이다. 일체의 미혹이 사라진 지혜롭고 자비로운 생명활동이 넘치는 진실한 세계인 것이다. 『화엄경』은 이러한 부처님과 그 세계에 대한 참모습을 밝히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삶을 펼쳐가는 법을 현실감 있게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삶을 깨우쳐주는 경전’으로 예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후대의 화엄학이 난해하고 복잡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면, 『화엄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지극히 순정(純正)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화엄경』에는 부처 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리심을 일으켜서 보살행을 실천 한다면 어떤 중생이라도 현실 세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바로 깨달음을 열어갈 수 있는 법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엄교학 사상의 문제점
『화엄경』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화엄경』은 본래 많은 독립된 경전들과 여러 가지 내용들을 종합해 60권 또는 80권이나 되는 방대 한 분량의 경전으로 형성된 것이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도 다양해서 이것을 통일해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화엄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나름대로 그 사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화엄경』이 중국에 전해진 후 중국 화엄 종파에서 시도한 그 이해 방법은 중국인의 전통적인 문화와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지극히 중국적인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경』에 설해져 있는 신비스럽고도 광대한 장엄과 현실감 넘치는 법계 (法界)의 광경이 중국 화엄학자들에 의해 형이상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 통일적 이해가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는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와 같은 철학적 체계화가 과연 『화엄경』 사상의 본질적인 이해에 공헌했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 화엄학자들이 선양한 화엄사상은 『화엄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는 해도 『화엄경』의 사상 그 자체는 아니다. 실제로는 화엄종의 견해와 『화엄경』 사상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중국 화엄학자의 눈을 통해 『화엄경』을 이해해 왔으며, 또한 그들의 화엄사상 연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전통적인 화엄교학에는 훌륭한 내용이 많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존재의 ‘본래성’에 중점을 둔다거나 지나치게 이상론적인 입장에서 현실을 관함으로써 수행이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미혹해서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어둠 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생에게 눈을 돌려서, 그들을 현실 속에서 밝은 깨달음의 삶을 실현해 나아가도록 하는 보살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실제 이것으로써는 중생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금까지 연구해 온 화엄사상이 중생을 구제하는 종교로서의 생명을 가질 수 없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엄교학의 여러 사상 체계들은 모두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성립한 것이지만,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뚜렷이 다르고, 사용하고 있는 용어도 현저히 다르다. 그중에서도 화엄교학의 여러 연구 업적들이 너무나 난해하다고 하는 점은 가장 커다란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통 화엄사상이 『화엄경』의 진정한 생명력이 도출되지 못하고 하나의 철학사상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하는 점은 절대적인 대승사상을 천명해 보살도를 강조하는 『화엄경』 본래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에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화엄사상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
『화엄경』에는 학문적으로 분석하는 법의 해석이 아니라 스스로 자각해서 수용 하고 실천해야 하는 법이 설해져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실현하는 법을 설하는 『화엄경』의 가르침은 세계의 본질에 관해 새로운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학문적 인 법의 해석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해탈과 구원을 촉진하고, 스스로 이를 수용해서 실천해야 할 진실[法]이 설해져 종교적 자각과 주체적인 실천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본질을 그대로 설하고 있는 경전이지만 『화엄경』과 화엄사상을 가까이하기란 쉽지가 않다.
사람들을 『화엄경』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는 너무나 방대해 읽기 가 쉽지 않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화엄경』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경전이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다 양한 방편을 써서 설한 것이지만,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청중의 이 해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중생 범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전설과 8종파의 조사(祖師)로 추앙받고 있는 용수(龍樹) 보살과 초기 대승불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해 대승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무 착(無着) 보살조차도 『화엄경』의 10지 수행도의 첫 단계[환희지]에만 오를 수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전설에는 부처님께서 누구를 위해 서 혹은 무엇 때문에 『화엄경』을 설했는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이 다. 이러한 전설은 『화엄경』의 사상적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화엄경』에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화엄사상에 대한 논의들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이 많았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깨달음을 실현해 나아가도록 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둡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중생들로 하여금 현실의 삶 속에서 깨달음을 구현하는 법을 중점적으로 설하고 있는 『화엄 경』의 교설은 본질적으로 종교 교설이다. 종교가 철학화되면 종교 본연의 생명력 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종교 교설인 화엄사상이 주로 철학적으로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아무런 활력을 주지 못하는 이론 체계로만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탄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과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일본 고마자와대학 불교학부 교환연구원, 금강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및 불교문화연구소장·대학 원장, 한국불교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금강대 불교인문학부 명예교수, 한마음선원 부설 대행선연구원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화엄경의 이해』, 『불교의 이해(공저)』 등이 있으며, 『화엄경』 연구에 전념해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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