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느낌에 대한 명상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갈망과 혐오 잘 다루기 위해서는 감각적 느낌에 대한 탐색이 중요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의 인도 종교 문화는 감각과 감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지 못했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바라문이나 은둔 수행자들이 몸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잘못 알고 몸을 혐오하고 있다고 부처님이 지적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처럼 그들은 심지어 감각적인 느낌을 혐오하기까지 했다. 인도의 고대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와 합일하기 위해 삼매를 얻는 명상법을 강조했고, 감각적 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느낌을 무시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달랐다. 갈망(tanha)과 혐오는 느낌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갈망과 혐오를 잘 다루기 위해서 감각적 느낌에 대한 면밀한 탐색이 중요하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전 시대에는 중요하지 않게 보았던 몸의 느낌에 대한 강조는 고통의 근본 원인을 알고 고통을 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불교의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 중 하나를 통해 외부의 대상과 만날 때 일어나는 느낌(즐거운, 불쾌한,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러한 집착이 쌓여 고통이 일어난다. 그리고 고통은 감각적 느낌에 대한 집착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고통을 다루는 방법도 감각적 느낌을 다루는 데 있다. 부처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항상 몸의 감각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이 수행자가 부지런히 다루어야 할 일감이라고 가르치셨다.
불교의 ‘웨다나’를 번역한 ‘느낌’은 생각과 결부되지 않고
단지 몸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각적 느낌일 뿐
이 글에서 말하는 ‘느낌’은 불교의 ‘웨다나(vedanā, 受)’를 번역한 것이다. 웨다나는 현대 심리학에서는 정확히 일치하는 용어가 없다. 대개 감정 또는 느낌이라고 번역하는데, 엄밀히 말해 감정(정서)과는 다르다. 웨다나는 정서보다 훨씬 기본적인 것으로 감각인상에 따라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반면에 심리학에서 의미하는 정서는 웨다나에 생각을 덧입히고, 더욱 다양한 정도의 좋고 싫음을 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감정(정서)은 웨다나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웨다나는 몸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쑤심, 저림, 가려움, 결림, 무거움, 어지러움, 메스꺼움, 피로함, 뜨거움, 차가움, 시원함, 상쾌함, 편안함 등이다. 이들은 생각과 결부되지 않고 단지 몸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각적 느낌일 뿐인 것으로 좋은 느낌이거나 싫은 느낌이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 중의 하나에 속한다.
수행 통해 느낌의 속성 이해해야…
느낌이 지속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만드는 생각 때문
유쾌하든, 불쾌하든, 중립적이든, 거칠든 미묘하든 간에 모든 느낌은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속성이란 모든 감각적 느낌은 생겨나고 머물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이러한 느낌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보면 이해되는 가르침이다. 감각적 느낌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일어난 느낌이 무엇이든 간에 오래지 않아 사그라든다. 즐거운 느낌일지라도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고, 괴로운 느낌도 오래가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느낌이 지속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saṅkhāra, 行)이 만드는 생각 때문이다. 좋은 것을 계속 누리고 싶고, 불쾌하고 싫은 것이 머물러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느낌에 관한 생각이 증폭되고 결국 생각이 생각을 낳는 순환의 고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늪에 빠지기 전에, 갈망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해 그러한 갈망이 있음을 알고 멀리하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부처님은 감각적 느낌을 경험하고 감각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그것에 반응하지 않도록 수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미국 위빠사나 수행처인 스피릿 록(Spirit Rock) 센터의 지도자 필립 모핏(Phillip Moffitt)은 자기 학생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생각의 세계에 빠져 감각적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신체적인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채 만성적인 근육통을 호소하는 그 학생은 섬유근육통이라는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모핏이 보기에, 그녀는 ‘몸의 느낌(고통)’과 ‘그 느낌에 관한 생각(괴로움)’이라는 동떨어진 두 개의 경험을 혼동하고 있었고, 몸의 불편한 느낌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경험하는 신체의 불편한 느낌과 그 느낌에 관한 생각과 감정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의 불쾌한 느낌에 대한 걱정과 혐오를 발달시켰고, 심지어 불편한 느낌이 일어나기 전부터 몸이 아플 것이고 몸이 아프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녀의 정신적 고통은 신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수련 기간이 시작될 때, 그녀는 여전히 신체적 고통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수련에 참여했지만, 명상 지도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서 자기 몸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수련 기간이 끝나고 놀랍게도 그녀는 가벼운 신체적 불편만 느꼈고, 마침내 왜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 명상이라고 부르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느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자기 몸의 느낌과 그것에 관한 생각과 감정은 별개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감각적 느낌은 일시적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감각에 대한 평정심 유지하는 법 배울 수 있어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은 명상 수행자 의식의 깊이에 따라 더욱 발달하게 된다. 수행자가 더 깊은 의식 상태에 도달하면, 더 미묘한 감각적 느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감각적 인식과 그것에 대한 느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지나가기 때문에 만일 수행자의 마음 상태가 거칠다면 거친 느낌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만일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훨씬 더 고요하고 순수한 상태에 있다면, 그러한 깊은 상태에서 감지하는 감각적 인식과 그 느낌은 훨씬 더 미묘하고 세밀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흥분한 마음 상태와 함께 일어나는 정서적인 흥분, 분노와 미움, 욕정과 같은 감정에 물들지 않고 단지 관찰하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마음속의 불순물은 힘을 잃게 되고 수행자는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감각적 느낌은 일시적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감각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지속적인 자기분석과 좋은 습관 통해 덕을 키우는 삶의 기술
부처님은 몸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면서 수행자의 생활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가를 제시하셨다. 이것은 윤리적 당위성에 따라 규칙을 무조건 지키는 것을 주장하는 여타의 종교적 윤리적 가르침과 달리 지속적인 자기분석과 좋은 습관을 통해 덕을 키우는 삶의 기술이다.
현대 위빠사나 운동을 이끄는 주역 중의 한 분인 고엔카는 명상 수행에서 특히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몸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고 오염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수행할수록,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더 일찍 알아차릴 수 있게 될 겁니다. 감정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감각적인 느낌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불길에서 손을 빼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에서 빠져나옵니다. 몸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의 더러움의 뿌리를 근절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문진건|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몸 느낌에 대한 명상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갈망과 혐오 잘 다루기 위해서는 감각적 느낌에 대한 탐색이 중요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의 인도 종교 문화는 감각과 감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지 못했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바라문이나 은둔 수행자들이 몸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잘못 알고 몸을 혐오하고 있다고 부처님이 지적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처럼 그들은 심지어 감각적인 느낌을 혐오하기까지 했다. 인도의 고대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와 합일하기 위해 삼매를 얻는 명상법을 강조했고, 감각적 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느낌을 무시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달랐다. 갈망(tanha)과 혐오는 느낌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갈망과 혐오를 잘 다루기 위해서 감각적 느낌에 대한 면밀한 탐색이 중요하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전 시대에는 중요하지 않게 보았던 몸의 느낌에 대한 강조는 고통의 근본 원인을 알고 고통을 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불교의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 중 하나를 통해 외부의 대상과 만날 때 일어나는 느낌(즐거운, 불쾌한,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러한 집착이 쌓여 고통이 일어난다. 그리고 고통은 감각적 느낌에 대한 집착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고통을 다루는 방법도 감각적 느낌을 다루는 데 있다. 부처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항상 몸의 감각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이 수행자가 부지런히 다루어야 할 일감이라고 가르치셨다.
불교의 ‘웨다나’를 번역한 ‘느낌’은 생각과 결부되지 않고
단지 몸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각적 느낌일 뿐
이 글에서 말하는 ‘느낌’은 불교의 ‘웨다나(vedanā, 受)’를 번역한 것이다. 웨다나는 현대 심리학에서는 정확히 일치하는 용어가 없다. 대개 감정 또는 느낌이라고 번역하는데, 엄밀히 말해 감정(정서)과는 다르다. 웨다나는 정서보다 훨씬 기본적인 것으로 감각인상에 따라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반면에 심리학에서 의미하는 정서는 웨다나에 생각을 덧입히고, 더욱 다양한 정도의 좋고 싫음을 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감정(정서)은 웨다나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본다면, 웨다나는 몸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쑤심, 저림, 가려움, 결림, 무거움, 어지러움, 메스꺼움, 피로함, 뜨거움, 차가움, 시원함, 상쾌함, 편안함 등이다. 이들은 생각과 결부되지 않고 단지 몸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각적 느낌일 뿐인 것으로 좋은 느낌이거나 싫은 느낌이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 중의 하나에 속한다.
수행 통해 느낌의 속성 이해해야…
느낌이 지속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만드는 생각 때문
유쾌하든, 불쾌하든, 중립적이든, 거칠든 미묘하든 간에 모든 느낌은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 속성이란 모든 감각적 느낌은 생겨나고 머물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이러한 느낌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보면 이해되는 가르침이다. 감각적 느낌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일어난 느낌이 무엇이든 간에 오래지 않아 사그라든다. 즐거운 느낌일지라도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고, 괴로운 느낌도 오래가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느낌이 지속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saṅkhāra, 行)이 만드는 생각 때문이다. 좋은 것을 계속 누리고 싶고, 불쾌하고 싫은 것이 머물러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느낌에 관한 생각이 증폭되고 결국 생각이 생각을 낳는 순환의 고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늪에 빠지기 전에, 갈망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해 그러한 갈망이 있음을 알고 멀리하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부처님은 감각적 느낌을 경험하고 감각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그것에 반응하지 않도록 수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미국 위빠사나 수행처인 스피릿 록(Spirit Rock) 센터의 지도자 필립 모핏(Phillip Moffitt)은 자기 학생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생각의 세계에 빠져 감각적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신체적인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채 만성적인 근육통을 호소하는 그 학생은 섬유근육통이라는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모핏이 보기에, 그녀는 ‘몸의 느낌(고통)’과 ‘그 느낌에 관한 생각(괴로움)’이라는 동떨어진 두 개의 경험을 혼동하고 있었고, 몸의 불편한 느낌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경험하는 신체의 불편한 느낌과 그 느낌에 관한 생각과 감정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의 불쾌한 느낌에 대한 걱정과 혐오를 발달시켰고, 심지어 불편한 느낌이 일어나기 전부터 몸이 아플 것이고 몸이 아프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녀의 정신적 고통은 신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수련 기간이 시작될 때, 그녀는 여전히 신체적 고통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수련에 참여했지만, 명상 지도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서 자기 몸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수련 기간이 끝나고 놀랍게도 그녀는 가벼운 신체적 불편만 느꼈고, 마침내 왜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 명상이라고 부르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느낌에 대한 명상을 통해 자기 몸의 느낌과 그것에 관한 생각과 감정은 별개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감각적 느낌은 일시적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감각에 대한 평정심 유지하는 법 배울 수 있어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은 명상 수행자 의식의 깊이에 따라 더욱 발달하게 된다. 수행자가 더 깊은 의식 상태에 도달하면, 더 미묘한 감각적 느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감각적 인식과 그것에 대한 느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지나가기 때문에 만일 수행자의 마음 상태가 거칠다면 거친 느낌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만일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훨씬 더 고요하고 순수한 상태에 있다면, 그러한 깊은 상태에서 감지하는 감각적 인식과 그 느낌은 훨씬 더 미묘하고 세밀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흥분한 마음 상태와 함께 일어나는 정서적인 흥분, 분노와 미움, 욕정과 같은 감정에 물들지 않고 단지 관찰하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마음속의 불순물은 힘을 잃게 되고 수행자는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감각적 느낌은 일시적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감각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지속적인 자기분석과 좋은 습관 통해 덕을 키우는 삶의 기술
부처님은 몸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면서 수행자의 생활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가를 제시하셨다. 이것은 윤리적 당위성에 따라 규칙을 무조건 지키는 것을 주장하는 여타의 종교적 윤리적 가르침과 달리 지속적인 자기분석과 좋은 습관을 통해 덕을 키우는 삶의 기술이다.
현대 위빠사나 운동을 이끄는 주역 중의 한 분인 고엔카는 명상 수행에서 특히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을 강조한다. “몸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고 오염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수행할수록,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더 일찍 알아차릴 수 있게 될 겁니다. 감정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감각적인 느낌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불길에서 손을 빼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에서 빠져나옵니다. 몸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의 더러움의 뿌리를 근절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문진건|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