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
- 부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무아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수행 정도에 따라 달라
무아(無我)는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의 하나이다. 하지만 무아는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교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후, 많은 사람이 무아의 교리를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 불교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 종교라고 단정하고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불교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고 무아의 교리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일반 대중의 무아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있다.
간단히 낱말을 뜻풀이하는 방식으로 무아를 해설하게 되면, 단지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만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렇게 단순하게 무아를 설명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죠’라는 무책임한 생각으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아의 가르침을 배우면, 누구든지 불안해질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데 누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무아는 나와 내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든 마음작용으로 만들어진 것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것’이다”라고 지칭할 수 있는 존재가 실제로 없다고 가르치셨다. 나와 내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든 마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셨다. 붓다의 이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무아’의 개념을 사용했다.
무아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수행 정도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마음의 작용을 잘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말을 개념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 가르침이 정말로 자아(自我)를 온통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인과관계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확립된 사람은 이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사실 여러 가지 맥락과 조건들에 의해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덧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비록 무아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행을 위한 중요한 가르침으로 알고, 실천을 통해 무아를 터득하려고 노력한다. 이들보다 수행이 깊은 사람, 즉 마음의 현상을 여실히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과 감정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나’와 ‘내 것’이라는 믿음이 실체가 없는 것을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러한 착각의 활동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버려둘 수 있다.
무아를 생각하는 것과 무아를 체험하는 것은 전혀 별개
유식불교에 의하면, 모든 인식과 의지 작용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나’와 ‘내 것’이라는 신념은 매우 깊은 선정의 상태에서 멈추게 된다. 즉 매우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나’에 대한 애착의 마음이 멈춘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깨닫는 것은 불교 수행이 깊어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무아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무아에 관해 조심하는 마음 없이 설명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는 것처럼 위험하다. 왜냐하면 인과관계를 잘 모르고 마음의 현상을 여실히 관찰할 수 없는 사람은 무아의 가르침을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으로 이해해 그 생각을 여기저기 갖다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아를 생각하는 것과 무아를 체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이다. 생각으로 무아를 이해하는 것을 경고하는 이야기가 일본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선사(禪師)가 사미승에게 “『반야심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말해보거라”라고 물었다. 초심자 스님은 합장하며 대답했다.
“저는 오온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없습니다.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느낌도 없고, 마음의 대상도 없습니다. 여섯 가지 의식(六識)이 없고, 십팔계(十八界)의 현상계가 없고, 열두 인연의 고리가 없고, 지혜와 성취도 없습니다.”
“너는 그 말을 믿는단 말이냐?”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네, 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나에게 더 가까이 오너라.” 스승이 제자에게 지시했다. 제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선사는 제자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제자가 몹시 괴로워하며 “스승님! 너무 아픕니다!”
선사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너는 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코가 없는데 뭐가 아프단 말이냐?”
무아를 체험할 수 있는 방법,
보살의 마음 일으켜 다른 사람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
이것은 무아를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무아를 생각으로 아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하는 이야기이다. 무아를 생각으로 알려고 하면 무아를 알 수가 없기에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를 체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를 통해 의지와 관심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에 대한 환상이 약해지고, ‘나’와 ‘내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의 범위가 모호해지고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선이 희미해진다. 이처럼 보살의 마음을 내서 타인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은 점차로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을 줄인다. 대승불교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를 돕기 위해 무조건 헌신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비이기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는 무아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의 마음은 비록 자신은 완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먼저 괴로움에서 구해주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강한 염원을 통해 자기만족의 목적을 초월할 수 있다. 이타적인 보살행으로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은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얻고 수행에 더욱 헌신하는 열정을 키운다. 보살의 길을 걸을 때, 수행하는 사람이 기억과 신체로 한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우리가 강한 신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더 큰 존재를 향할 때 비로소 작은 자기의 끊임없는 요구를 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립을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경향은 우리의 고유한 불성과 그것의 실현 능력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에 반비례해 감소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스승들은 한없이 넓은 부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완전한 자유와 평온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비로소 안심(安心)한다는 말과 같다. 안심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경지’를 말한 것에서 비롯된 불교 용어다. 정토불교에서는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해 극락왕생의 신앙을 확립하는 일’이 안심이라고 설명한다.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 스님은 “안심은 마음이 벽과 같아지는 것이며 이때 비로소 도에 든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무아는 부처님께 마음을 맡겨 부처님의 마음으로 행할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무아는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부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인 행위이다.
문진건|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무아(無我)
- 부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무아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수행 정도에 따라 달라
무아(無我)는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의 하나이다. 하지만 무아는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교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후, 많은 사람이 무아의 교리를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 불교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 종교라고 단정하고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불교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고 무아의 교리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일반 대중의 무아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있다.
간단히 낱말을 뜻풀이하는 방식으로 무아를 해설하게 되면, 단지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만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렇게 단순하게 무아를 설명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죠’라는 무책임한 생각으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아의 가르침을 배우면, 누구든지 불안해질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데 누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무아는 나와 내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든 마음작용으로 만들어진 것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것’이다”라고 지칭할 수 있는 존재가 실제로 없다고 가르치셨다. 나와 내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든 마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셨다. 붓다의 이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무아’의 개념을 사용했다.
무아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수행 정도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마음의 작용을 잘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말을 개념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 가르침이 정말로 자아(自我)를 온통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인과관계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확립된 사람은 이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사실 여러 가지 맥락과 조건들에 의해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덧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비록 무아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행을 위한 중요한 가르침으로 알고, 실천을 통해 무아를 터득하려고 노력한다. 이들보다 수행이 깊은 사람, 즉 마음의 현상을 여실히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과 감정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나’와 ‘내 것’이라는 믿음이 실체가 없는 것을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러한 착각의 활동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버려둘 수 있다.
무아를 생각하는 것과 무아를 체험하는 것은 전혀 별개
유식불교에 의하면, 모든 인식과 의지 작용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나’와 ‘내 것’이라는 신념은 매우 깊은 선정의 상태에서 멈추게 된다. 즉 매우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나’에 대한 애착의 마음이 멈춘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깨닫는 것은 불교 수행이 깊어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무아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무아에 관해 조심하는 마음 없이 설명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는 것처럼 위험하다. 왜냐하면 인과관계를 잘 모르고 마음의 현상을 여실히 관찰할 수 없는 사람은 무아의 가르침을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으로 이해해 그 생각을 여기저기 갖다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아를 생각하는 것과 무아를 체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이다. 생각으로 무아를 이해하는 것을 경고하는 이야기가 일본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선사(禪師)가 사미승에게 “『반야심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말해보거라”라고 물었다. 초심자 스님은 합장하며 대답했다.
“저는 오온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없습니다.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느낌도 없고, 마음의 대상도 없습니다. 여섯 가지 의식(六識)이 없고, 십팔계(十八界)의 현상계가 없고, 열두 인연의 고리가 없고, 지혜와 성취도 없습니다.”
“너는 그 말을 믿는단 말이냐?”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네, 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나에게 더 가까이 오너라.” 스승이 제자에게 지시했다. 제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선사는 제자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제자가 몹시 괴로워하며 “스승님! 너무 아픕니다!”
선사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너는 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코가 없는데 뭐가 아프단 말이냐?”
무아를 체험할 수 있는 방법,
보살의 마음 일으켜 다른 사람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
이것은 무아를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무아를 생각으로 아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하는 이야기이다. 무아를 생각으로 알려고 하면 무아를 알 수가 없기에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를 체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살의 마음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를 통해 의지와 관심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에 대한 환상이 약해지고, ‘나’와 ‘내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의 범위가 모호해지고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선이 희미해진다. 이처럼 보살의 마음을 내서 타인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은 점차로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을 줄인다. 대승불교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를 돕기 위해 무조건 헌신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비이기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는 무아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의 마음은 비록 자신은 완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먼저 괴로움에서 구해주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강한 염원을 통해 자기만족의 목적을 초월할 수 있다. 이타적인 보살행으로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은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얻고 수행에 더욱 헌신하는 열정을 키운다. 보살의 길을 걸을 때, 수행하는 사람이 기억과 신체로 한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우리가 강한 신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더 큰 존재를 향할 때 비로소 작은 자기의 끊임없는 요구를 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립을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경향은 우리의 고유한 불성과 그것의 실현 능력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에 반비례해 감소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스승들은 한없이 넓은 부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완전한 자유와 평온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비로소 안심(安心)한다는 말과 같다. 안심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경지’를 말한 것에서 비롯된 불교 용어다. 정토불교에서는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해 극락왕생의 신앙을 확립하는 일’이 안심이라고 설명한다. 선불교의 초조인 달마 스님은 “안심은 마음이 벽과 같아지는 것이며 이때 비로소 도에 든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무아는 부처님께 마음을 맡겨 부처님의 마음으로 행할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무아는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부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인 행위이다.
문진건|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