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 | 명법문
2023-01-05
법정 스님의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
법정 스님(1932~2010) |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세상에 나옵니다. 그것을 불성 혹은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 피우는 일이 바로 삶입니다. 불성과 영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우려면 우리 마음을 맑히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흔히 마음을 맑혀라, 마음을 비워라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맑히고 비울 것인가? 절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 중에도 절에 안 다니는 사람보다 옹졸하고 꽉 막혀서 무엇 하나 배울 것이 없는 이들도 많이 있어요. 관념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인 것으로는 마음이 맑혀지지 않습니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관념적으로 빠지기 쉬워요. 현실적으로 선행해야 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두루 착한 일을 행할 때 저절로 우리 마음이 열리고 맑아집니다.
시절 인연이 오면 스스로 연꽃이 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두루 착한 일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의 둘레에도 점점 맑은 기운이 번져갑니다.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공자님 같은 성인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분들의 맑은 마음은 메아리가 되고 두루 비추는 빛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인류 역사에 안 계셨다면 현재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그럼 선행이란 무엇일까요? 선행, 착한 일. 그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나눈다는 건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 주는 게 아니에요. 나눔이란 가진 사람이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지분해야 할 보상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이 우주의, 법계의 선물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가는 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란 나누는 겁니다. 또 바라밀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시바라밀이란 세상을 사는 데 제일가는 덕이 보시, 곧 나누는 일이란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존재 전체를 기울여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다음 순간 더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 서로의 마음이 맑아져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질 않아요. 늘 겪는 일이죠. 선물의 경우 너무 크고 많으면 받는 사람이 부담스럽습니다. 작은 것,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것을 알게 되면 맑은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맑은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제가 있는 곳은 궁핍하고, 거의 모든 것이 원시 상태예요. 하지만 그게 편해서, 그곳에서는 순수한 나로 존재할 수 있어서 지금 나그네처럼 머물고 있는 겁니다. 지난겨울에 밖에는 눈이 내리고 뒷골에서는 노루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하니까 내 마음도 소년처럼 부풀어 오르려고 해요. 그래서 묵은 편지들을 뒤적이다가 몇 군데 답장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참 먹을 갈다가 편지 쓸 종이를 찾으니까 도배하고 남은 종이 사이에서 쪼가리 화선지가 두어 장 나와요. 다행이다 싶어 그걸 잘 다듬어서 편지지를 만들었죠. 그런데 종이가 한정되어 있다 싶으니까 아주 조심해서, 잔글씨로 편지를 쓰면서 아주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서울에 나왔다가 지업사에서 한 20장의 화선지를 사 갖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쪼가리 종이에 편지를 쓸 때의 그 오붓함, 살뜰함이 어디로 가고 없어요. 많다는 건 그런 겁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립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제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가난하게 느끼는 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가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지만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입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자연의 질서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왔습니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논밭의 기름진 흙, 천연의 생수와 강물. 오늘 종일 말해도 다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자연은 우리에게 주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고마워할 줄 몰라요. 감사는 고사하고 함부로 더럽히고 허물고 끝없이 학대하고 있습니다. 들짐승조차도 자기 둥지는 더럽히지 않는데 인간이, 소위 문명을 이루었다는 인간이 자기의 생활 환경인 자연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앓고 있는 자연은 곧 우리가 병을 앓는 것이요, 자연의 신음 소리는 우리의 신음 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소우주이기 때문입니다.
병이 든 자연, 허물어져버린 자연에는 우리 인간들이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죽어가듯 인간의 생명도 위협받기 때문이에요. 과하게 소비하면서 자연환경의 파괴를 부축일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적은 것, 작은 것의 귀함, 소중함을 알아서 더 이상 자연이 병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눔으로써 맑은 기쁨을 얻으려 하고 만족할 줄 알며, 소유는 꼭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제한하려는 그 마음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해가는 명상이고,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지혜의 길이요, 후자는 자비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을 통해 우리는 본래부터 지녔던 불성과 영성의 씨앗을 틔워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인연으로 저마다 자신이 지닌 그 귀한 불성의 씨앗으로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길 거듭 다짐합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선행과 나눔으로 맑혀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을, 그리고 맑은 은혜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꿉시다.
* 이 법문은 『좋은 말씀 - 법정 스님 법문집』[법정 저, (주)시공사 刊, 2020년]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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