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八正道)가 곧 중도다|성철 스님의 명법문
2024-02-20
팔정도(八正道)가
곧 중도다
성철 스님 법문
팔정도에는 바른 길 뜻하는 중도사상 드러나 있어
팔정도(八正道)는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리로서 출가 수행자나 세속인이 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지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의 의미는 이 정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는 글자 그대로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란 뜻이니, 여기에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뜻하는 중도사상이 드러나 있습니다. 부처님은 확실하게 팔정도는 곧 중도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여래가 현등각(現等覺)한 것으로서, 눈[眼]을 생하고 지혜[智]를 생하고 적정(寂靜)・증지(證智)・등각(等覺)・열반(涅槃)에 도움이 되는 중도라 하는가? 그것은 곧 팔성도(八聖道)이다. 말하자면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여래가 현등각한 것으로, 눈을 생하고 지혜를 생하고 적정・증지・등각・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라 한다. -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율부(律部)』 3)
정견이 맨 먼저 거론되는 점에 유의해야
팔정도의 원어는 팔지성도(八支聖道, ariyo atthangiko maggo)로 그 의미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라는 뜻입니다.
먼저 정견(正見, sammā-ditthi)은 바른 견해, 즉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말하는 것이니, 요컨대 불교의 진리인 연기(緣起)와 사제(四諦)나 중도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면 모든 법을 바로 보게 되어 바른 마음가짐인 올바른 사유[正思惟, sāmmā-saňkappa]를 하게 되고, 마음가짐이 올바르면 그에 따라 올바른 언어[正語, sammā-vācā]를 구사하게 되며, 올바른 신체적 행위[正業, sammā-kammanta]를 하게 됩니다. 정명[正命, sammā-jiva]의 명[命, jiva]은 활명(活命), 곧 일상생활을 의미하므로 올바른 생활을 말합니다. 분수를 넘어서는 행동이나 불규칙한 생활을 시정하여 도리에 맞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정진(sammā-vāyāma)은 악을 소멸하고 선을 증대시키는 올바른 노력을 말하며, 정념(sammā-sati)은 올바른 생각을 말하는데 보통 바른 진리와 지혜를 잃지 않고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정(sammā-samādhi)은 올바른 선정으로 정신집중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선정에는 사선(四禪) 등의 선정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팔정도는 정견에서 시작하여 정정으로 끝나는데, 무엇보다도 맨 먼저 정견이 거론되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를 얻어 모든 법을 바로 보기 전에는 정사유 등 나머지 팔정도가 하나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견은 바로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 즉 중도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정견으로 모든 법을 바로 보면 정사도 되고 정어・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성립합니다.
어떤 것을 여래께서 정등각(正等覺)한 중도라 하는가?
즉 팔정도니,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다.
-『전법륜경(轉法輪經)』 「상응부(相應部)」 6
이것은 남전에 있는 ‘초전법륜(初轉法輪)’이어서 「상응부(相應部)」, 「중부(中部)」 4, 「증지부(增支部)」 1 등에 실려 있습니다. 북전 한역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중도라 하는가? 말하자면 팔정도이다.
하위중도(何謂中道)오 소위팔정도(所謂八正道)니라 -『오분율(五分律)』권 15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적·구경론적 의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팔정도에 ‘정(正)’이라는 말이 붙었을까? 양변을 떠나서 변견이 아닌 중정(中正)한 정견, 곧 중도정견입니다. 중도가 곧 팔정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정’이라는 말을 바로 알려면 중도를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나는 중도를 정등각했다” 하시고 “중도가 팔정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팔정도를 깨쳤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팔정도가 방법론인가 목적론인가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가 구경 목표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경 목표로 향하는 방법인가 하는 논란입니다. 대개 팔정도가 구경 목표로 향하는 방법론이지 구경 목표인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정등각했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쳤고,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이와 같이 목적론적・구경론적 의미를 가집니다.
의상 스님도 “구경에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어 부처라 한다.[궁좌실제중도상 구내부동명위불(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알아서 깨친 사람이 부처라고 했습니다. 중도가 곧 성불이고, 성불이 곧 중도입니다. 그렇다면 중도가 목적론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팔정도를 말할 때, 방법론적으로 말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팔정도는 올바른 삶의 지침이므로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전도되고 근본과 지말이 뒤섞인 자리에서는 말이라도 바로 하고 생각이라도 바로 갖게 하기 위해서 방법론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방편설일 뿐입니다. 중도가 팔정도라는 근본 뜻은 양변을 떠난 중도를 정등각해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완전히 목적론이지 방법론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들어야 합니다.
◦ 이 법문은 『성철 스님 백일 법문-상』(퇴옹 성철 저, 도서출판 장경각 刊, 2021)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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