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스님 법문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공의 이치
모든 존재의 바탕에서 볼 때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존재성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을 할 때 허무감과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금쪽같이 소중한 자기가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 분명히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사람도 있고 각 동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중생은 누구나 꿈속에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볼 때는 명명유육취(明明有六趣)라, 중생은 생사윤회(生死輪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닫고 보면 공공무대천(空空無大千)이라, 다 텅텅 비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아무런 존재성이 없습니다.
부처님 눈으로 보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중생은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있습니다. 업(業)만큼 가려진 견해로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지 차원을 달리하면 대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느끼는 괴로움은 사실이 아니고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지양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을 해야 성불을 한다,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론 체계 없이 참선만 했다가는 어두운 구렁에 빠진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원력을 믿고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금생에는 염불삼매에 들 수 있고 내생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법집을 가지면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 자체입니다.
부처님 법은 마음을 깨닫는 법입니다.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제한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허공같이 끝도 없고 한도 없어 우주 끝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무량무변의 허공 세계가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몸뚱이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가두어놓고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자연적으로 욕심이 나오고 진심(瞋心)이 나오고 치심(痴心)이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제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무명심(無明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성격은 끝도 한도 없는 불심(佛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텅 비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량없는 성품공덕(性品功德)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작디작은 소립자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 에너지, 우주의 기(氣)에는 무시무시한 힘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는 훨씬 더 위대한 한량없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밝힌 분이 부처님입니다.
마음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항시 존재하는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참말로 알게 되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집니다. 불사신(不死身)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우주에 끝없이 널려 있고 모양이 없으니 갈등이 될 것도 없어집니다. 마음의 근본 성품, 즉 불심은 조작도 없고 흠도 없는 진실한 자리이기에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끝도 한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나, 이것을 대아(大我) 또는 진아(眞我)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진아를 깨닫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만 부처님 법문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고 방편설(方便說)이어서 그때그때 중생의 정도에 따라서 상응된 법문이기 때문에 차원이 낮고 높고 하는 차이는 있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다음 맨 처음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설했습니다. 가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법문입니다. 제불보살(諸佛菩薩)이나 신장(神將)은 이해했지만 중생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서 말씀하신 것이 『아함경(阿含經)』입니다.
부처님이 설사 쉬운 법문을 말씀했더라도 그 안에는 깊은 말씀도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법문을 들을 때 차원이 낮은 법문을 듣고도 그 즉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문이 좋다, 궂다 함부로 시비할 것은 아닙니다.
우선 참선(參禪)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개 참선은 차원이 높은 사람이 하고 염불은 차원이 낮은 사람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참선 가운데에 염불이 들어 있고 또 염불 가운데에 참선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부처입니다. 모든 것은 근본 본체(根本 本體)가 있고 또 활용할 용(用)이 있습니다.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하나의 상이고 현상의 근본 성품은 본체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부처이고 일체 존재의 근원 자리에 부처 아님은 없습니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은 부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참선인 것입니다. 염불을 하건 경을 외우건 명상을 하건 마음이 산란하게 현상적인 것에 끌리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불심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모두가 다 참선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본래 자리를 떠나면 참선이 아니고, 염불을 하더라도 불성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됩니다.
마음의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 참다운 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두를 의심하건 의심하지 않건 또 염불을 하건 염불을 하지 않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공부하는 마음 자세가 불심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모두 다 참선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일은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부처님 견해를 우리 견해로 만드는 일입니다.
염불선 수행
우리의 무지무명(無知無明) 가운데서 가장 지독한 것은 내 몸뚱이만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독심(三毒心)이 비롯됩니다. 과거 전생에 삼독심을 제대로 끊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밖에는 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본래 열려 있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닫고 있습니다.
부처님 정통 14대 조사인 용수보살 저서 가운데 『대비바사론』이 있습니다. 이책 다섯째 품이 이행품(易行品)이고 중생이 쉽게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우는 방법입니다. 우리 마음은 업의 습관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통일을 시켜야 합니다. 참선을 몇 년 하더라도 마음이 통일되고 정화되기 어렵습니다. 가장 쉬운 것은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은 부처이므로 부처님, 우리 자신, 불심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화엄경』에도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마음, 부처, 중생, 이 세 가지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한 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갑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 자리, 우주의 근본 생명 자리를 외우면 한 번 듣고서 업장이 가벼우면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외우면 능히 업장을 녹여서 생명의 본 고향인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염불참선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과 우주의 근본 성품을 마음에 두고 염불해야 비로소 염불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마음을 통일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방편입니다. 중국 송(宋)나라 때 대혜종고 스님이 체계를 세웠습니다. 달마나 혜능 스님 때까지도 화두는 없었습니다.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마음의 근본 자리를 참구하는 태도가 아니라면 참다운 화두가 되지 못합니다.
염불선은 가장 쉬운 공부
천지 우주가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극락세계입니다. 여기나 저기나 본래 극락세계인데 중생은 업장(業障)에 가려 극락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이 자리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가 극락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삼매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부처님 쪽으로 통일된 상태를 말합니다. 산란한 분별 시비에서 벗어나 진아(眞我)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삼매 가운데 가장 쉬운 삼매가 염불삼매입니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삼매에 빠져듭니다. 염불할 때 ‘부처와 내가 둘이다’라고 생각하면 염불선 공부가 되지 못합니다. ‘부처와 나, 모든 존재와 나,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본래 성품에 머물러 염불을 하거나 명상에 잠기면 그것이 가장 좋은 참선법이 됩니다. 화두를 드나 안 드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근본 자리, 불성 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성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불심이고 불성입니다.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이 자리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모두 가장 쉽고 행복한 방법으로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 이 법문은 청화 스님이 전남 곡성군 성륜사 대웅전에서 설법한 내용을 모아 펴낸 『청화 스님의 불교 핵심 교리 설법』(상상출판사 刊) 중에서 김태겸(수필가)이 발췌, 요약한 것이다.
청화 스님 법문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공의 이치
모든 존재의 바탕에서 볼 때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존재성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을 할 때 허무감과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금쪽같이 소중한 자기가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 분명히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사람도 있고 각 동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중생은 누구나 꿈속에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볼 때는 명명유육취(明明有六趣)라, 중생은 생사윤회(生死輪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닫고 보면 공공무대천(空空無大千)이라, 다 텅텅 비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아무런 존재성이 없습니다.
부처님 눈으로 보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중생은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있습니다. 업(業)만큼 가려진 견해로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지 차원을 달리하면 대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느끼는 괴로움은 사실이 아니고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지양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선을 해야 성불을 한다,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론 체계 없이 참선만 했다가는 어두운 구렁에 빠진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원력을 믿고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금생에는 염불삼매에 들 수 있고 내생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법집을 가지면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 자체입니다.
부처님 법은 마음을 깨닫는 법입니다.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제한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허공같이 끝도 없고 한도 없어 우주 끝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무량무변의 허공 세계가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몸뚱이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가두어놓고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자연적으로 욕심이 나오고 진심(瞋心)이 나오고 치심(痴心)이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제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무명심(無明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성격은 끝도 한도 없는 불심(佛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텅 비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량없는 성품공덕(性品功德)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작디작은 소립자에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 에너지, 우주의 기(氣)에는 무시무시한 힘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는 훨씬 더 위대한 한량없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밝힌 분이 부처님입니다.
마음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항시 존재하는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참말로 알게 되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집니다. 불사신(不死身)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우주에 끝없이 널려 있고 모양이 없으니 갈등이 될 것도 없어집니다. 마음의 근본 성품, 즉 불심은 조작도 없고 흠도 없는 진실한 자리이기에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끝도 한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나, 이것을 대아(大我) 또는 진아(眞我)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진아를 깨닫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만 부처님 법문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고 방편설(方便說)이어서 그때그때 중생의 정도에 따라서 상응된 법문이기 때문에 차원이 낮고 높고 하는 차이는 있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다음 맨 처음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설했습니다. 가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법문입니다. 제불보살(諸佛菩薩)이나 신장(神將)은 이해했지만 중생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서 말씀하신 것이 『아함경(阿含經)』입니다.
부처님이 설사 쉬운 법문을 말씀했더라도 그 안에는 깊은 말씀도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법문을 들을 때 차원이 낮은 법문을 듣고도 그 즉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문이 좋다, 궂다 함부로 시비할 것은 아닙니다.
우선 참선(參禪)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개 참선은 차원이 높은 사람이 하고 염불은 차원이 낮은 사람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참선 가운데에 염불이 들어 있고 또 염불 가운데에 참선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부처입니다. 모든 것은 근본 본체(根本 本體)가 있고 또 활용할 용(用)이 있습니다.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하나의 상이고 현상의 근본 성품은 본체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부처이고 일체 존재의 근원 자리에 부처 아님은 없습니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은 부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참선인 것입니다. 염불을 하건 경을 외우건 명상을 하건 마음이 산란하게 현상적인 것에 끌리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불심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모두가 다 참선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본래 자리를 떠나면 참선이 아니고, 염불을 하더라도 불성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됩니다.
마음의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 참다운 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두를 의심하건 의심하지 않건 또 염불을 하건 염불을 하지 않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공부하는 마음 자세가 불심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모두 다 참선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일은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부처님 견해를 우리 견해로 만드는 일입니다.
염불선 수행
우리의 무지무명(無知無明) 가운데서 가장 지독한 것은 내 몸뚱이만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독심(三毒心)이 비롯됩니다. 과거 전생에 삼독심을 제대로 끊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밖에는 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본래 열려 있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 닫고 있습니다.
부처님 정통 14대 조사인 용수보살 저서 가운데 『대비바사론』이 있습니다. 이책 다섯째 품이 이행품(易行品)이고 중생이 쉽게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우는 방법입니다. 우리 마음은 업의 습관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통일을 시켜야 합니다. 참선을 몇 년 하더라도 마음이 통일되고 정화되기 어렵습니다. 가장 쉬운 것은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은 부처이므로 부처님, 우리 자신, 불심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화엄경』에도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마음, 부처, 중생, 이 세 가지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한 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갑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 자리, 우주의 근본 생명 자리를 외우면 한 번 듣고서 업장이 가벼우면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외우면 능히 업장을 녹여서 생명의 본 고향인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염불참선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과 우주의 근본 성품을 마음에 두고 염불해야 비로소 염불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마음을 통일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방편입니다. 중국 송(宋)나라 때 대혜종고 스님이 체계를 세웠습니다. 달마나 혜능 스님 때까지도 화두는 없었습니다.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마음의 근본 자리를 참구하는 태도가 아니라면 참다운 화두가 되지 못합니다.
염불선은 가장 쉬운 공부
천지 우주가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극락세계입니다. 여기나 저기나 본래 극락세계인데 중생은 업장(業障)에 가려 극락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이 자리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가 극락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삼매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부처님 쪽으로 통일된 상태를 말합니다. 산란한 분별 시비에서 벗어나 진아(眞我)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삼매 가운데 가장 쉬운 삼매가 염불삼매입니다. 염불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삼매에 빠져듭니다. 염불할 때 ‘부처와 내가 둘이다’라고 생각하면 염불선 공부가 되지 못합니다. ‘부처와 나, 모든 존재와 나,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본래 성품에 머물러 염불을 하거나 명상에 잠기면 그것이 가장 좋은 참선법이 됩니다. 화두를 드나 안 드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근본 자리, 불성 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성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불심이고 불성입니다.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이 자리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모두 가장 쉽고 행복한 방법으로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 이 법문은 청화 스님이 전남 곡성군 성륜사 대웅전에서 설법한 내용을 모아 펴낸 『청화 스님의 불교 핵심 교리 설법』(상상출판사 刊) 중에서 김태겸(수필가)이 발췌, 요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