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서는 말,
다가오는 말
이은선 소설가

◦ 말은 삶의 도구이며 인연을 이어준다
“언어”에 관해서라면 내게는 두 가지의 장소가 있다.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던 스물네 살 때, 한국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러 갔던 우즈베키스탄과 태어나 작가가 되었던 내 나라, 이 땅이다. 두 나라가 내게 전생의 무슨 인연이었을까. 그곳을 잇는 한 가지 언어, 바로 “한국말”은 나에게 소통의 근원이자 나라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었던 소중한 ‘여권’이었다.
모국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게 몸에 배어 있던 ‘말’을 가지고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그 ‘말’을 품은 내가 이방인 혹은 소통 불능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길거리에서 상말부터 혹은 가격 흥정부터 배워야 하는 시장의 ‘말’마저도 무엇인가가 통할 수 있다면 다행인 나날이었다. 그나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한 학생들의 열의 덕분에 나는 내게 익숙한 ‘말’을 가르치며 잠시나마 그 땅의 일원이 되던 시간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재에 나온 한국어를 가르쳤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면 학생들은 나에게 택시를 잡는 법, 시장에서 돈 계산을 하는 법을 우즈벡어와 러시아어로 알려주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언어와의 밀당 같은 시간이었다. 그나마 내게는 상대적으로 익숙했던 영어가 얼마나 편리한 외국어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도 많았다. 바꾸어 생각하면 학생들에게도 세계 3대 난어(難語)라 불리는 한국어를 배우기가 무척 고되었을 것 같다.
우즈베키스탄 세계언어대학에는 ‘한국말’을 배우려고 대학까지 진학한 학생들의 열의가 이미 실크로드를 넘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어’란 단순히 학문 이상의 것이었다. 미래, 꿈 그리고 더 나아가 돈을 벌게 해주는 어떤 곳의 큰 관문을 뚫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고 ‘한국 드라마’를 같이 시청했다. “말”은 그렇게 노래와 극, 생활을 종횡무진하며 현지인들과 나를 이어주었다. 나의 말투로,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그들도 사용하며 서로 동화되어갔다.
◦ 우리의 말은 어디에나 있다
‘말’을 가르치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났을 적에는 단순히 “소통”과 “교육”의 의미였지만, 돌아와서 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할 적에는 소통을 넘어선 인간 근원의 모순과 관계들을 고도의 제련된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작가가 되었다. 단순한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닌 문장을 가다듬고, 정제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이다. 독자가 된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던 학생들도 있었다.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결혼을 했고, 여기에 터를 잡고 살면서 내가 쓴 글을 읽고 있다고 연락을 해오는 학생 아니 이제는 어엿한 한국의 시민이 된 친구들이 처음 배웠던 내 말투로 인사를 해온다. “잘 읽었어요, 선생님. 우즈벡 얘기 더 써주세요!” 놀랍도록 유창해진 한국어 발음으로 여전히 앳된 얼굴을 했던 내 인생 첫 번째 제자들의 그 말이라니!
열심히 한국어를 가르쳤지만 급한 생계를 위해 일하기 힘든 곳에 취직을 한 학생들에게는 따로 찾아가서 농장 혹은 공장과 어판장에서 쓸 가장 요긴한 말 혹은 급할 때 외쳐야 할 말부터 알려줘야 했던 때도 있었다. ‘다쳤어요’ 혹은 ‘구급차 불러주세요’, ‘월급이 안 들어왔어요’ 같은 현실의 말들을 한 글자씩 써주거나 핸드폰으로 보내주던 때로부터 이십 년. 우리의 말은 어디에나 있고, 꼭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말이 나오지 않아’ 혹은 ‘말을 몰라서’ 험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변론을 해주던 때도 요긴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일들을, 사람들을 소설로 다시 쓰고 있다.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로. 이제는 그 모든 역할을 스마트폰의 번역 앱이 대신하고 있다.
삶의 도구이자 내 시간의 기록을 충실하게 맡아준 한국말에 감사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이 언어로 삶의 뾰족한 모퉁이를 제련하고, 누군가에게 힘차게 “안녕”을 건넬 수 있는 이 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과 덕과 우연이 스쳤던 걸까. 전생도 궁금하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후생도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그 ‘말’이 이어준 인연들을 떠올린다. 내일은 또 어떤 ‘말’들이 다가와 내게 소설 속 문장으로 차곡차곡 쌓일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갓 태어난 아이가 말을 배울 적에도 이 말은 제일 먼저 가르쳤던 것 같다.
“사랑해요”와 “안녕하세요!”
이 말을 오랫동안 입에서 오물거리던 아이가 어느덧 내게 그 말을 돌려주는 나날이다. 꽃 봄의 예쁜 한국의 말이 내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이은선|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외교통상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세계언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코끼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한신대 문예창작학과에서 강의했다. 소설집 『발치카 No.9』, 『유빙의 숲』 등을 펴냈다.
다가서는 말,
다가오는 말
이은선 소설가
◦ 말은 삶의 도구이며 인연을 이어준다
“언어”에 관해서라면 내게는 두 가지의 장소가 있다.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던 스물네 살 때, 한국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러 갔던 우즈베키스탄과 태어나 작가가 되었던 내 나라, 이 땅이다. 두 나라가 내게 전생의 무슨 인연이었을까. 그곳을 잇는 한 가지 언어, 바로 “한국말”은 나에게 소통의 근원이자 나라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었던 소중한 ‘여권’이었다.
모국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게 몸에 배어 있던 ‘말’을 가지고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그 ‘말’을 품은 내가 이방인 혹은 소통 불능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길거리에서 상말부터 혹은 가격 흥정부터 배워야 하는 시장의 ‘말’마저도 무엇인가가 통할 수 있다면 다행인 나날이었다. 그나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한 학생들의 열의 덕분에 나는 내게 익숙한 ‘말’을 가르치며 잠시나마 그 땅의 일원이 되던 시간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 교재에 나온 한국어를 가르쳤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면 학생들은 나에게 택시를 잡는 법, 시장에서 돈 계산을 하는 법을 우즈벡어와 러시아어로 알려주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언어와의 밀당 같은 시간이었다. 그나마 내게는 상대적으로 익숙했던 영어가 얼마나 편리한 외국어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도 많았다. 바꾸어 생각하면 학생들에게도 세계 3대 난어(難語)라 불리는 한국어를 배우기가 무척 고되었을 것 같다.
우즈베키스탄 세계언어대학에는 ‘한국말’을 배우려고 대학까지 진학한 학생들의 열의가 이미 실크로드를 넘어서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어’란 단순히 학문 이상의 것이었다. 미래, 꿈 그리고 더 나아가 돈을 벌게 해주는 어떤 곳의 큰 관문을 뚫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고 ‘한국 드라마’를 같이 시청했다. “말”은 그렇게 노래와 극, 생활을 종횡무진하며 현지인들과 나를 이어주었다. 나의 말투로,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그들도 사용하며 서로 동화되어갔다.
◦ 우리의 말은 어디에나 있다
‘말’을 가르치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났을 적에는 단순히 “소통”과 “교육”의 의미였지만, 돌아와서 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할 적에는 소통을 넘어선 인간 근원의 모순과 관계들을 고도의 제련된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작가가 되었다. 단순한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닌 문장을 가다듬고, 정제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이다. 독자가 된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던 학생들도 있었다.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결혼을 했고, 여기에 터를 잡고 살면서 내가 쓴 글을 읽고 있다고 연락을 해오는 학생 아니 이제는 어엿한 한국의 시민이 된 친구들이 처음 배웠던 내 말투로 인사를 해온다. “잘 읽었어요, 선생님. 우즈벡 얘기 더 써주세요!” 놀랍도록 유창해진 한국어 발음으로 여전히 앳된 얼굴을 했던 내 인생 첫 번째 제자들의 그 말이라니!
열심히 한국어를 가르쳤지만 급한 생계를 위해 일하기 힘든 곳에 취직을 한 학생들에게는 따로 찾아가서 농장 혹은 공장과 어판장에서 쓸 가장 요긴한 말 혹은 급할 때 외쳐야 할 말부터 알려줘야 했던 때도 있었다. ‘다쳤어요’ 혹은 ‘구급차 불러주세요’, ‘월급이 안 들어왔어요’ 같은 현실의 말들을 한 글자씩 써주거나 핸드폰으로 보내주던 때로부터 이십 년. 우리의 말은 어디에나 있고, 꼭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말이 나오지 않아’ 혹은 ‘말을 몰라서’ 험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변론을 해주던 때도 요긴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일들을, 사람들을 소설로 다시 쓰고 있다.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로. 이제는 그 모든 역할을 스마트폰의 번역 앱이 대신하고 있다.
삶의 도구이자 내 시간의 기록을 충실하게 맡아준 한국말에 감사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이 언어로 삶의 뾰족한 모퉁이를 제련하고, 누군가에게 힘차게 “안녕”을 건넬 수 있는 이 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과 덕과 우연이 스쳤던 걸까. 전생도 궁금하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후생도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그 ‘말’이 이어준 인연들을 떠올린다. 내일은 또 어떤 ‘말’들이 다가와 내게 소설 속 문장으로 차곡차곡 쌓일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갓 태어난 아이가 말을 배울 적에도 이 말은 제일 먼저 가르쳤던 것 같다.
“사랑해요”와 “안녕하세요!”
이 말을 오랫동안 입에서 오물거리던 아이가 어느덧 내게 그 말을 돌려주는 나날이다. 꽃 봄의 예쁜 한국의 말이 내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이은선|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외교통상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세계언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코끼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한신대 문예창작학과에서 강의했다. 소설집 『발치카 No.9』, 『유빙의 숲』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