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제대로
수행하리라는
서원 하나로
배광식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제21회 대원상 수상자

보리회 창립과 수덕사 수련대회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불심 장한 3학년 선배님들을 따라 사대부고 보리회 창립에 참여하게 되었고, 창립 법회에 숭산 큰스님(당시 행원 큰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창립 법회를 가졌다. ‘자동차는 운전자가 있어 움직이는데 내 몸을 움직이는 놈은 누구인가? 내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인가, 거꾸로 서 있는 것인가? 내가 똑바로 서 있다면 지구 반대편 호주에 있는 사람은 거꾸로 서 있는 것인가, 바로 서 있는 것인가?’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신선하고 시원했다.
무진장 큰스님(당시 혜명 스님)을 지도 법사로 모신 보리회의 정기 법회가 있었고, 조계사 중고등학생회에서는 광덕 큰스님, 법운(法雲) 이종익(李種益, 1912~1991) 거사님 등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법운 거사님은 중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 『사명대사』를 감명 깊게 읽을 때 그 저자로 익어진 분이었다. ‘불교는 과학이요 초과학이며, 철학이요 초철학이며, 종교요 초종교이다’라는 법운 거사님의 불교학 개론 서두의 말씀이 가슴에 스몄다.
고2 때 한겨울 눈 쌓인 수덕사에서 10여 명의 보리회 학생들이 열흘간의 수련 대회를 가졌다. 당시는 장항선을 타고 삽교역에서 해미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덕산 삼거리에서 내려, 눈 쌓인 비포장도로로 산모롱이를 몇 번이나 돌아 족히 십오 리는 걸어야 수덕사에 이를 수 있었다. 원담 큰스님(당시 혜공 총무 스님)의 「법성게」 법문과 매일 8시간의 참선 수행이 평생의 큰 자량이 되었다. 스님들과 한방에서 참선 수행을 했는데, 어느 순간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님들께서는 그 자리에서도 그 이후에도 이에 대해 꾸지람이나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조석으로 참여하는 대웅전의 예불 시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마룻바닥에 발이 에이는 듯했다. 수련 대회가 끝나는 날 저녁에는 원담 큰스님과 스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수련생 각각이 그동안의 살림살이에 대한 발표회도 가졌다. 수덕사를 출발하는 날 오전에는 보살계 수계식에, 원담 큰스님께서 지어주신 법명 법철(法哲)이 기재된 계첩도 받았다.
평소 항상 고요한 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수련 기간 동안 도시의 소음들과 분주함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수련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평소에 유장하고 고요하게 느껴졌던 수제천(壽齊天)조차 소음으로 들렸다. 한동안 사고의 틀이 부서진 듯 책을 읽는 내용과 학교 강의의 내용 등이 뜻으로 잘 들어오지 않고 메아리 졌다.
자애로운 광덕 큰스님과 불광법회
조계사 중고등학생회에서 처음 뵙게 된 광덕 큰스님은 당시 정화불교회관(조계사 경내에 있었음)의 총무원에서 교무부장 직책이셨고, 뚝섬 봉은사의 주지도 맡고 계셨다. 고교 시절 한때 뚝섬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 봉은사의 광덕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큰스님의 안모에서는 언제나 자애로운 빛이 넘쳐흘렀다. 큰스님과 툇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가을볕을 받으며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었다.
1974년 11월 불교 잡지 월간 『불광』을 창간하신 큰스님께서는, 1975년 10월 대각사에서 불광법회 창립 법회를 열었고, 레지던트 1년 차로 갓 결혼했던 필자는 처와 함께 불광법회에서 『금강경』 법문을 들었는데 대각사 법당이 넘쳐 다른 방에서 스피커를 통해 음성만 듣는 청법자도 많았다. 1980년 치과 군의관 복무를 마친 후, 불광법회에 계속 나갔고, 큰스님께서는 지역마다 법등(法燈)을 만들며, 이를 전법 모임의 기초 단위로 삼는 현대 불교 전법 모델을 확립하셨다.
1978년 법당봉납발원법회를 열고, 땅 1평 사기 모금 활동을 시작하신 큰스님께서는 법당 부지를 물색하다가 당시 신흥 부촌인 불광동과 허허벌판인 석촌동 두 곳 중에 석촌동 부지로 최종 결정하고, 1982년 10월 신축된 석촌동 불광사에 입주했다.
1987년 3월 창립한 불광유치원에는 둘째 아이가 1회로 입학했고, 평소 가족이 큰스님을 자주 찾아뵈어 익숙한 둘째는 유치원 쉬는 시간에 혼자 큰스님 방에 찾아가기도 했다.
광덕 큰스님께서 『불광』에 1년여 ‘생활인의 불교 신앙’ 연재 기회를 주신 덕분에 불교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큰스님께서는 항상 『불광』의 모든 원고를 꼼꼼하게 다 읽어보시고 손수 교정을 보셨다.
희유하여이다! 청화 큰스님을 뵙다
토요일 오전 진료만 마치고, 평생 도반 수형과 태안사로 향했다. 밤늦게 도착해 일요일 이른 아침 일제히 울기 시작한 산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이른 아침 전남 곡성의 퇴락한 절 태안사에서 해회당 툇마루를 걸레로 훔치고 계시는 큰스님의 모습을 뵙는 순간 『금강경』 시작머리에 느닷없는 듯한 ‘희유하여이다 세존이시여’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큰스님께서는 수형과 필자를 해회당 큰방에 불러 앉히시고, 『금강심론』과 『정토삼부경』을 주시면서, 『금강심론』은 몇백 년 혹은 천 년에 한 번 나오실 만한 분의 저서로 꼭 읽어보기를 권하셨다.
『금강심론』은 청화 큰스님의 은사이신 금타 대화상님의 유고를 큰스님께서 편저한 책으로 초기 불교에서 대승 밀교까지를 총망라한 『팔만대장경』의 압축본이라 할 만하다. 30여 년 하루도 쉬지 않고 한 줄이라도 읽다 보니 뜻이 드러나고, “금강 불교 입문에서 성불까지(http://cafe.daum.net/vajra )” 카페의 도반님들과 두세 번 반복해 강독을 하다 보니, 『금강심론 주해 I, II, III』을 출판하게 되었다.
1989년 태안사 삼 년 결사를 마치신 청화 큰스님을 모시고, 500명 정원의 코엑스 국제회의장에서 2,000여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법회를 마친 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인원의 법회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올바로 수행하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다”라는 경책의 말씀에 따라 금강 도반들과 2024년 11월 23일 제7차 염불선 천일수행 입재를 했다.
2003년 음력 10월 19일(양력 11월 12일) 대천계의 큰 은혜를 입고, 시냇물 같은 적은 갚음만 했다는 겸손으로, 중생의 전도된 삶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열반하신 청화 큰스님의 열반 21주기 해남 대흥사 다례제에 다녀와 2024년 제21회 대원상을 수상하게 된 뜻을 새기며 불교 진흥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다짐해본다.
배광식|서울대학교 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치의과대학원 보존과 교수, 미국 OHSU 치과대학·미국 플로리다대 치과대학·메릴랜드대 치과대학 방문 교수, 서울대 교수불자회 ‘불이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대한불교조계종 국제포교사, 사단법인 참수레 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천 개의 연꽃잎으로 피어나리라』 등이 있다.
오직 제대로
수행하리라는
서원 하나로
배광식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제21회 대원상 수상자
보리회 창립과 수덕사 수련대회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불심 장한 3학년 선배님들을 따라 사대부고 보리회 창립에 참여하게 되었고, 창립 법회에 숭산 큰스님(당시 행원 큰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창립 법회를 가졌다. ‘자동차는 운전자가 있어 움직이는데 내 몸을 움직이는 놈은 누구인가? 내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인가, 거꾸로 서 있는 것인가? 내가 똑바로 서 있다면 지구 반대편 호주에 있는 사람은 거꾸로 서 있는 것인가, 바로 서 있는 것인가?’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신선하고 시원했다.
무진장 큰스님(당시 혜명 스님)을 지도 법사로 모신 보리회의 정기 법회가 있었고, 조계사 중고등학생회에서는 광덕 큰스님, 법운(法雲) 이종익(李種益, 1912~1991) 거사님 등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법운 거사님은 중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 『사명대사』를 감명 깊게 읽을 때 그 저자로 익어진 분이었다. ‘불교는 과학이요 초과학이며, 철학이요 초철학이며, 종교요 초종교이다’라는 법운 거사님의 불교학 개론 서두의 말씀이 가슴에 스몄다.
고2 때 한겨울 눈 쌓인 수덕사에서 10여 명의 보리회 학생들이 열흘간의 수련 대회를 가졌다. 당시는 장항선을 타고 삽교역에서 해미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덕산 삼거리에서 내려, 눈 쌓인 비포장도로로 산모롱이를 몇 번이나 돌아 족히 십오 리는 걸어야 수덕사에 이를 수 있었다. 원담 큰스님(당시 혜공 총무 스님)의 「법성게」 법문과 매일 8시간의 참선 수행이 평생의 큰 자량이 되었다. 스님들과 한방에서 참선 수행을 했는데, 어느 순간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님들께서는 그 자리에서도 그 이후에도 이에 대해 꾸지람이나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조석으로 참여하는 대웅전의 예불 시간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마룻바닥에 발이 에이는 듯했다. 수련 대회가 끝나는 날 저녁에는 원담 큰스님과 스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수련생 각각이 그동안의 살림살이에 대한 발표회도 가졌다. 수덕사를 출발하는 날 오전에는 보살계 수계식에, 원담 큰스님께서 지어주신 법명 법철(法哲)이 기재된 계첩도 받았다.
평소 항상 고요한 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수련 기간 동안 도시의 소음들과 분주함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수련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평소에 유장하고 고요하게 느껴졌던 수제천(壽齊天)조차 소음으로 들렸다. 한동안 사고의 틀이 부서진 듯 책을 읽는 내용과 학교 강의의 내용 등이 뜻으로 잘 들어오지 않고 메아리 졌다.
자애로운 광덕 큰스님과 불광법회
조계사 중고등학생회에서 처음 뵙게 된 광덕 큰스님은 당시 정화불교회관(조계사 경내에 있었음)의 총무원에서 교무부장 직책이셨고, 뚝섬 봉은사의 주지도 맡고 계셨다. 고교 시절 한때 뚝섬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 봉은사의 광덕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큰스님의 안모에서는 언제나 자애로운 빛이 넘쳐흘렀다. 큰스님과 툇마루에 걸터앉아 따뜻한 가을볕을 받으며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었다.
1974년 11월 불교 잡지 월간 『불광』을 창간하신 큰스님께서는, 1975년 10월 대각사에서 불광법회 창립 법회를 열었고, 레지던트 1년 차로 갓 결혼했던 필자는 처와 함께 불광법회에서 『금강경』 법문을 들었는데 대각사 법당이 넘쳐 다른 방에서 스피커를 통해 음성만 듣는 청법자도 많았다. 1980년 치과 군의관 복무를 마친 후, 불광법회에 계속 나갔고, 큰스님께서는 지역마다 법등(法燈)을 만들며, 이를 전법 모임의 기초 단위로 삼는 현대 불교 전법 모델을 확립하셨다.
1978년 법당봉납발원법회를 열고, 땅 1평 사기 모금 활동을 시작하신 큰스님께서는 법당 부지를 물색하다가 당시 신흥 부촌인 불광동과 허허벌판인 석촌동 두 곳 중에 석촌동 부지로 최종 결정하고, 1982년 10월 신축된 석촌동 불광사에 입주했다.
1987년 3월 창립한 불광유치원에는 둘째 아이가 1회로 입학했고, 평소 가족이 큰스님을 자주 찾아뵈어 익숙한 둘째는 유치원 쉬는 시간에 혼자 큰스님 방에 찾아가기도 했다.
광덕 큰스님께서 『불광』에 1년여 ‘생활인의 불교 신앙’ 연재 기회를 주신 덕분에 불교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큰스님께서는 항상 『불광』의 모든 원고를 꼼꼼하게 다 읽어보시고 손수 교정을 보셨다.
희유하여이다! 청화 큰스님을 뵙다
토요일 오전 진료만 마치고, 평생 도반 수형과 태안사로 향했다. 밤늦게 도착해 일요일 이른 아침 일제히 울기 시작한 산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이른 아침 전남 곡성의 퇴락한 절 태안사에서 해회당 툇마루를 걸레로 훔치고 계시는 큰스님의 모습을 뵙는 순간 『금강경』 시작머리에 느닷없는 듯한 ‘희유하여이다 세존이시여’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큰스님께서는 수형과 필자를 해회당 큰방에 불러 앉히시고, 『금강심론』과 『정토삼부경』을 주시면서, 『금강심론』은 몇백 년 혹은 천 년에 한 번 나오실 만한 분의 저서로 꼭 읽어보기를 권하셨다.
『금강심론』은 청화 큰스님의 은사이신 금타 대화상님의 유고를 큰스님께서 편저한 책으로 초기 불교에서 대승 밀교까지를 총망라한 『팔만대장경』의 압축본이라 할 만하다. 30여 년 하루도 쉬지 않고 한 줄이라도 읽다 보니 뜻이 드러나고, “금강 불교 입문에서 성불까지(http://cafe.daum.net/vajra )” 카페의 도반님들과 두세 번 반복해 강독을 하다 보니, 『금강심론 주해 I, II, III』을 출판하게 되었다.
1989년 태안사 삼 년 결사를 마치신 청화 큰스님을 모시고, 500명 정원의 코엑스 국제회의장에서 2,000여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법회를 마친 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인원의 법회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올바로 수행하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다”라는 경책의 말씀에 따라 금강 도반들과 2024년 11월 23일 제7차 염불선 천일수행 입재를 했다.
2003년 음력 10월 19일(양력 11월 12일) 대천계의 큰 은혜를 입고, 시냇물 같은 적은 갚음만 했다는 겸손으로, 중생의 전도된 삶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열반하신 청화 큰스님의 열반 21주기 해남 대흥사 다례제에 다녀와 2024년 제21회 대원상을 수상하게 된 뜻을 새기며 불교 진흥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다짐해본다.
배광식|서울대학교 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치의과대학원 보존과 교수, 미국 OHSU 치과대학·미국 플로리다대 치과대학·메릴랜드대 치과대학 방문 교수, 서울대 교수불자회 ‘불이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 대한불교조계종 국제포교사, 사단법인 참수레 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천 개의 연꽃잎으로 피어나리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