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불교 한가운데서
계속된다
고영섭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제15회 원효학술상 수상자

태어나면서부터 불교 만나 지금까지 인문 학자, 불교 학자로 살아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불교를 만났다. 우리 집 앞 오십 미터 거리에는 흥룡사가 있었다. 우리 집 뒤 삼십 미터쯤에 있는 집에 사는 친구의 부친은 내 이름을 작명한 스님(박화서)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백 미터 남짓 되는 곳에는 경북 상주의 주산인 천봉산(석악)의 중심 사찰인 천봉사가 있었다.
이처럼 나는 사찰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살아왔다. 상주에는 북장사와 남장사(노악), 갑장사(연악)와 승장사(조선 후기 폐사)의 사장사(四長寺)가 있다.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이들 사장사를 다니면서도 인연이 깊었던 청담(1902~1971) 선사의 주석처인 서울시 삼각산의 도선사를 원찰로 삼아 오십 년 넘게 다니셨다. 그 덕에 우리 가족도 모두 불자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도선사를 원찰로 여겼다.
1975년에 서울로 전학 온 나는 서울의 주산인 삼각산 아래의 화계사를 소속 사찰로 삼아 학생회와 청년회를 성심껏 다녔다. 학생회 신문인 「화계월보」를 창간하고 전속 기자로서 매월 30여 면의 지면을 자필로 써서 마스터 인쇄로 펴냈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나는 동국대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에 진학해 지금까지 인문 학자, 불교 학자로 살아오고 있다.
입대 후 불사 발원해 쌍칠사에 ‘우리 절 우리 법당’ 짓고
낙성식까지 마치고 전역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나는 28사단의 수색대를 거쳐 포병대대에 근무하면서 쌍칠사 임시 법당에서 수요 및 일요 법회를 이어갔다. 주특기가 탄약병이었던 나는 병기과 서무계를 맡아 근무하면서 대대 불교 군종을 겸해 불사를 발원했다. 나는 대대장과 군수과장의 지원을 받으며 전곡에 사는 사당 전문 목수 5인을 사서 법당 불사를 추진했다. 병사들과 들것으로 산을 깎아 차량호의 절터를 메운 뒤 임진강의 모래와 자갈을 퍼와 기초를 다졌으며, 전곡 유적지의 기와 공장에서 오래된 조선 기와를 구입해 지붕에 올려 제대 직전에 25평의 ‘우리 절 우리 법당’을 짓고 낙성식을 마친 뒤 전역했다.
불교학과지와 불대문학회, 인문학 계간지 발간 비롯해
등재학술지 『한국불교사연구』, 『불교철학』 간행
복학 이후에는 불교학과 학생회장을 맡아 ‘한국 불교의 중흥은 동대 불교학과로부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불교학과지 『불교공동체』를 창간해 5호(1989~1993)까지 펴냈으며, 불대문학회를 결성해 사화집 『통일꽃』을 3호까지 펴내고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6년 동안의 강사 고행 기간을 거쳐 불교학과에 자리를 잡고부터는 인문학 계간지 『문학 사학 철학』 제81호를 간행해오고 있다. 또 선학들의 서원이었던 한국불교사학회(한국불교사연구소)를 개회해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한국불교사연구』 제27호를 간행해오고 있다. 나아가 동국대 불교대학 내에 세계불교학연구소(원) 원효학연구실(소)을 개소하고 개실해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불교철학』 제16집을 간행해오고 있다.
붓다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은 나의 세계관이자 인간관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붓다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을 나의 세계관이자 인간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인 등단 이후 나의 시들에는 불교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나/ 몰현금(沒絃琴)의 여운만 남겨둔 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필사(必死)의 힘으로 달려간다// 눈에 비늘을 쓴 채/ 허방에 쏘았던/ 무수한 노래의 화살들/ 오늘 내 살 촉에 맞은 해가// 세 발 달린 까마귀의/ 눈빛으로 되살아나/ 돋보기의 촛점 안에서/ 삶의 무늬를 그리는 순간// 정곡(正鵠)의 도가니에/ 온몸을 던져버린/ 화살의 전 생애/ 나는 이미 없다.” (졸시 「절창(絶唱)」)
사학도인 나의 역사서에는 붓다의 중도사관인 연기사관이 역사관으로서 저절로 스며들었다.
“불교는 이 땅 고유의 천신신앙(天)과 산신신앙(地)과 무속신앙(人)을 풍류도의 큰 가슴으로 통섭하여 한국사상의 본류가 되었으며 이것을 다시 도교와 유교와 기독교의 지류에 흘려줌으로써 한국사상의 심층바다로 자리해오고 있다. 불교는 한국인들에게 철학하는 법과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한국인의 국가관, 윤리관, 생사관, 예술관, 복식관, 음식관, 주거관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불교는 이 땅에서 역사와 철학과 종교 등으로 깊게 토착화되었고 예술과 문화와 과학 등으로 넓게 한국화되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사상은 한국사상의 마중물이 되었고 한국사상은 한국불교사상과 한우물이 되었다.” (졸저 『 한국불교사궁구』 중에서)
철학도인 나의 철학서에는 붓다 철학의 중도와 연기, 자비와 지혜의 무늬가 깊게 아로새겨졌다.
“불교사상사는 붓다가 펼친 중도연기가 만나는 지점과 원효가 펼친 일심, 일(본)각 내지 중도 일심과 소통하는 지점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일심의 이문과 본각의 이각은 중도의 이제와 연기의 공성, 심층마음과 표층의식을 해명하는 지점에서 깊게 만나고 있다. 원효가 일심과 일(본)각 내지 중도와 연기로 존재자들의 본래 마음과 수행체계에 치중해 설했다면, 붓다는 중도와 연기로 존재자들의 존재법칙과 실천체계에 집중해 설하였다. 그리하여 붓다와 원효는 존재법칙과 본래 마음 사이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졸저 『 분황원효불교사상사』 중에서)
참선과 절은 나의 신심과 수행의 원천…
붓다의 사상에 물든 나는 매 순간 행복
이처럼 붓다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은 나의 문사철학 전반에 깊게 훈습되어 있다. 소장 학자에서 중견 학자를 지나는 동안 나의 하루 삶은 참선과 백팔 배로 시작되었다. 참선은 나를 깨어 있게 했으며 백팔 배는 나를 성찰하게 했다. 급한 원고에 밀려 그날의 절을 하지 못하면 그다음 날에 채웠고 해외 학술 발표와 기행을 가게 되면 호텔에서 밀린 백팔 배를 모두 채웠다.
미국 보스턴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낼 때도 참선과 백팔 배는 이어갔다. 한국불교학회 회장을 할 때도 참선과 절은 나의 신심과 수행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도 참선 수행은 매일 하고 백팔 배는 가끔 하고 있지만 그 순간은 내가 깨어 있는 순간이자 성찰하는 시간이 된다. 붓다의 사상에 물이 든 나는 오늘도 매 순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정말이지 세월은 참 부지런하다/ 쉴 줄도 모르고 달려만 간다/ 어제는 감쪽같이 어디로 가고/ 내일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난/ 오늘의 순간에 머물러 보려/ 갖은 용을 써보고 또 써보지만/ 눈깜짝하고 숨내쉴만한 순식간에/ 순간은 저만치 또 저만치 간다/ 아아, 어느 순간에 살아야 하리/ 그냥 다 잊고 이 순간에 살 수밖에.”
(졸시 「이 순간에 살아야 – 화두 7」).
고영섭|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한국불교사 및 동아시아불교사상사 전공)를 받았으며,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한림대 강사, 한국불교학회 회장,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학자, 일본 동경대 대학원 외국인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월간 『문학과창작』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는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소장.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불학사』, 『한국불교사탐구』, 『원효, 한국불교의 새벽』, 『분황원효불교사상사』 등과 시집 『몸이라는 화두』 등이 있다.
내 삶은
불교 한가운데서
계속된다
고영섭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제15회 원효학술상 수상자
태어나면서부터 불교 만나 지금까지 인문 학자, 불교 학자로 살아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불교를 만났다. 우리 집 앞 오십 미터 거리에는 흥룡사가 있었다. 우리 집 뒤 삼십 미터쯤에 있는 집에 사는 친구의 부친은 내 이름을 작명한 스님(박화서)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백 미터 남짓 되는 곳에는 경북 상주의 주산인 천봉산(석악)의 중심 사찰인 천봉사가 있었다.
이처럼 나는 사찰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살아왔다. 상주에는 북장사와 남장사(노악), 갑장사(연악)와 승장사(조선 후기 폐사)의 사장사(四長寺)가 있다.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이들 사장사를 다니면서도 인연이 깊었던 청담(1902~1971) 선사의 주석처인 서울시 삼각산의 도선사를 원찰로 삼아 오십 년 넘게 다니셨다. 그 덕에 우리 가족도 모두 불자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도선사를 원찰로 여겼다.
1975년에 서울로 전학 온 나는 서울의 주산인 삼각산 아래의 화계사를 소속 사찰로 삼아 학생회와 청년회를 성심껏 다녔다. 학생회 신문인 「화계월보」를 창간하고 전속 기자로서 매월 30여 면의 지면을 자필로 써서 마스터 인쇄로 펴냈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나는 동국대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에 진학해 지금까지 인문 학자, 불교 학자로 살아오고 있다.
입대 후 불사 발원해 쌍칠사에 ‘우리 절 우리 법당’ 짓고
낙성식까지 마치고 전역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나는 28사단의 수색대를 거쳐 포병대대에 근무하면서 쌍칠사 임시 법당에서 수요 및 일요 법회를 이어갔다. 주특기가 탄약병이었던 나는 병기과 서무계를 맡아 근무하면서 대대 불교 군종을 겸해 불사를 발원했다. 나는 대대장과 군수과장의 지원을 받으며 전곡에 사는 사당 전문 목수 5인을 사서 법당 불사를 추진했다. 병사들과 들것으로 산을 깎아 차량호의 절터를 메운 뒤 임진강의 모래와 자갈을 퍼와 기초를 다졌으며, 전곡 유적지의 기와 공장에서 오래된 조선 기와를 구입해 지붕에 올려 제대 직전에 25평의 ‘우리 절 우리 법당’을 짓고 낙성식을 마친 뒤 전역했다.
불교학과지와 불대문학회, 인문학 계간지 발간 비롯해
등재학술지 『한국불교사연구』, 『불교철학』 간행
복학 이후에는 불교학과 학생회장을 맡아 ‘한국 불교의 중흥은 동대 불교학과로부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불교학과지 『불교공동체』를 창간해 5호(1989~1993)까지 펴냈으며, 불대문학회를 결성해 사화집 『통일꽃』을 3호까지 펴내고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6년 동안의 강사 고행 기간을 거쳐 불교학과에 자리를 잡고부터는 인문학 계간지 『문학 사학 철학』 제81호를 간행해오고 있다. 또 선학들의 서원이었던 한국불교사학회(한국불교사연구소)를 개회해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한국불교사연구』 제27호를 간행해오고 있다. 나아가 동국대 불교대학 내에 세계불교학연구소(원) 원효학연구실(소)을 개소하고 개실해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불교철학』 제16집을 간행해오고 있다.
붓다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은 나의 세계관이자 인간관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붓다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을 나의 세계관이자 인간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인 등단 이후 나의 시들에는 불교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나/ 몰현금(沒絃琴)의 여운만 남겨둔 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필사(必死)의 힘으로 달려간다// 눈에 비늘을 쓴 채/ 허방에 쏘았던/ 무수한 노래의 화살들/ 오늘 내 살 촉에 맞은 해가// 세 발 달린 까마귀의/ 눈빛으로 되살아나/ 돋보기의 촛점 안에서/ 삶의 무늬를 그리는 순간// 정곡(正鵠)의 도가니에/ 온몸을 던져버린/ 화살의 전 생애/ 나는 이미 없다.” (졸시 「절창(絶唱)」)
사학도인 나의 역사서에는 붓다의 중도사관인 연기사관이 역사관으로서 저절로 스며들었다.
“불교는 이 땅 고유의 천신신앙(天)과 산신신앙(地)과 무속신앙(人)을 풍류도의 큰 가슴으로 통섭하여 한국사상의 본류가 되었으며 이것을 다시 도교와 유교와 기독교의 지류에 흘려줌으로써 한국사상의 심층바다로 자리해오고 있다. 불교는 한국인들에게 철학하는 법과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한국인의 국가관, 윤리관, 생사관, 예술관, 복식관, 음식관, 주거관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불교는 이 땅에서 역사와 철학과 종교 등으로 깊게 토착화되었고 예술과 문화와 과학 등으로 넓게 한국화되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사상은 한국사상의 마중물이 되었고 한국사상은 한국불교사상과 한우물이 되었다.” (졸저 『 한국불교사궁구』 중에서)
철학도인 나의 철학서에는 붓다 철학의 중도와 연기, 자비와 지혜의 무늬가 깊게 아로새겨졌다.
“불교사상사는 붓다가 펼친 중도연기가 만나는 지점과 원효가 펼친 일심, 일(본)각 내지 중도 일심과 소통하는 지점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일심의 이문과 본각의 이각은 중도의 이제와 연기의 공성, 심층마음과 표층의식을 해명하는 지점에서 깊게 만나고 있다. 원효가 일심과 일(본)각 내지 중도와 연기로 존재자들의 본래 마음과 수행체계에 치중해 설했다면, 붓다는 중도와 연기로 존재자들의 존재법칙과 실천체계에 집중해 설하였다. 그리하여 붓다와 원효는 존재법칙과 본래 마음 사이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졸저 『 분황원효불교사상사』 중에서)
참선과 절은 나의 신심과 수행의 원천…
붓다의 사상에 물든 나는 매 순간 행복
이처럼 붓다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은 나의 문사철학 전반에 깊게 훈습되어 있다. 소장 학자에서 중견 학자를 지나는 동안 나의 하루 삶은 참선과 백팔 배로 시작되었다. 참선은 나를 깨어 있게 했으며 백팔 배는 나를 성찰하게 했다. 급한 원고에 밀려 그날의 절을 하지 못하면 그다음 날에 채웠고 해외 학술 발표와 기행을 가게 되면 호텔에서 밀린 백팔 배를 모두 채웠다.
미국 보스턴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낼 때도 참선과 백팔 배는 이어갔다. 한국불교학회 회장을 할 때도 참선과 절은 나의 신심과 수행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도 참선 수행은 매일 하고 백팔 배는 가끔 하고 있지만 그 순간은 내가 깨어 있는 순간이자 성찰하는 시간이 된다. 붓다의 사상에 물이 든 나는 오늘도 매 순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정말이지 세월은 참 부지런하다/ 쉴 줄도 모르고 달려만 간다/ 어제는 감쪽같이 어디로 가고/ 내일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난/ 오늘의 순간에 머물러 보려/ 갖은 용을 써보고 또 써보지만/ 눈깜짝하고 숨내쉴만한 순식간에/ 순간은 저만치 또 저만치 간다/ 아아, 어느 순간에 살아야 하리/ 그냥 다 잊고 이 순간에 살 수밖에.”
(졸시 「이 순간에 살아야 – 화두 7」).
고영섭|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한국불교사 및 동아시아불교사상사 전공)를 받았으며,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한림대 강사, 한국불교학회 회장,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학자, 일본 동경대 대학원 외국인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월간 『문학과창작』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는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소장.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불학사』, 『한국불교사탐구』, 『원효, 한국불교의 새벽』, 『분황원효불교사상사』 등과 시집 『몸이라는 화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