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생물학적 기능이 크게 저하되는 것을 ‘노화’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다들 두려워하는 사태다. 그걸 피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노화 방지(anti-aging)를 연구하고, 노쇠 현상을 가리는 수많은 방법을 사용한다. ‘늙음’이나 ‘노화’가 마치 질병이라도 되는 것 같다.
한국에선 나이 많은 분들을 ‘어르신’이라며 최대치로 높인 말로 칭하지만, 그 ‘어르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르신’은 정말 경칭(敬稱)일까? 나이가 좀 든 연후에는 누가 나이 물으면 ‘실례’라고 비난한다. 나이 든 상태에 존경의 지향성이 담겨 있다면, 그걸 확인하는 걸 실례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늙음은 어쩌다가 이렇게 피하고 싶은 ‘질병’ 같은 게 되었을까? 물론 생물학적 능력의 저하가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사실만으론 이처럼 감추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게 되지 않는다. 가령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조차, 때로는 더할 수 없는 철학적 미덕이나 미학적 아름다움으로 상찬되지 않는가!
현대 철학의 개념을 살짝 빌려다 말하자면, 늙음이란 단지 생물학적 상태를 표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기계적 상태’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입력 장치는 고장나고 출력 장치만 가동되는 상태, 그게 바로 늙음이다. 귀로든 눈으로든 새로운 걸 아무리 입력해도 소용없다. 그냥 흘러나가버리거나 금방 잊는다. 그리곤 언제나 하던 말을 반복하고 하던 행위를 반복한다. 들으려 하지 않고 말만 하려 하니, 하는 말은 대개 ‘우기는’ 게 되기 십상이고, 배운 게 없어도 ‘장유유서’는 알고 ‘어르신’이란 말로 추켜세워주니, 언제나 ‘가르치려’ 들기 마련이다.
늙었다는 게 이런 기계적 상태라 함은 늙었다는 말이 단지 나이와 그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나이가 40대여도 입력 장치가 고장나고 출력 장치만 가동되며, 뭔가 배우고 공부하려 하지 않으면, 더구나 자신이 아는 걸로 가르치려 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충분히 ‘늙었다’고 해야 한다. 남보다 높은 지위에 있어서 남을 부리고 명령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일찍 ‘늙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에게 시킬 권리가 확고하다 보니, 남 얘기 듣고 그 사람 눈치 볼 일 없으니, 입력 장치는 점점 무력화되고 출력 장치만 강화되기 십상이니. 이런 분들은 얼굴마저도 딱딱해진다. 딱딱함이란 ‘경화’를 표현하는 말이고, 경화란 생물학적으로도 늙음의 확실한 징표다.
늙음은 단지 생물학적 상태가 아니다. 그렇기에 늙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대면해야 하는 어떤 기계적 상태에 대한 반응이다. 어떤 얘기를 해도 거의 입력되지 않고 하던 얘기만 반복해서 출력하는 기계라면, 아무리 훌륭한 엔지니어라도 다루기 어렵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기계’처럼 고장났다며 폐기할 수도 없다. 출력 결과에 반하는 대응을 하면 화를 내거나 강요의 언행이 다시 출력되니, 그래서도 안 된다. 반대로 ‘장유유서’의 도덕을 들이대며 출력한 바에 충실히 따라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늙음이란 생물학적 상태보다 훨씬 난감한 ‘질병’이다. ‘늙었다’는 말은 생물학적 상태와 구별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생물학적 상태와 독립적으로 이런 기계적 상태가 출현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유기체의, 어쩌면 자연스럽다 할 방어기제 때문에 나타난다. ‘자아’가 바로 그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의 몸은 60조 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는 여러 세포소기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세포는 박테리아들의 공생체다. 우리 몸은 그런 공생체들이 수십조 개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체다. 말 그대로 ‘중생(衆生)’이다.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서로 협조하며 공생하지만, 신체의 각 부분이 동일한 의지를 갖고 동일한 방식으로만 살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이다. 신체 안의 각 부분들을 유기체 전체의 의지에 따라 통합해 하나처럼 움직이게 지휘하는 것이 자아다. 외부에서 오는 진입자들을 식별해 유기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쳐내고 방어하는 것도 자아의 작용이다. 면역계가 바로 그것이다. 세포도, 기관도 독자적 생명체에서 나온 것이니 나름의 식별 능력이 있지만, 인간이 갖는 의식은 유기체 전체를 ‘나’라고 믿는 자아에 속한다.
그렇기에 자아는 변화하는 자기 신체 내부의 미시적 움직임에 최대한 동일성을 부여하려 하고, 외부에서 오는 변화에 대해서도 자신을 동일하게 유지하려 한다. 흔히 ‘정체성’이라 번역되는 아이덴티티(identity)는 정확히 자기의 ‘동일성’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나름 생존에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지만, 이게 너무 강하면 생존에 치명적인 병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알레르기, 그리고 류머티즘 같은 자가 면역 반응이다. 면역 반응은 내 몸에 속한 것과 바깥에서 침투한 것을 식별해, 외부자를 공격하는 반응이다. 그런데 자아의 식별 작용이 강한 경우, 약간만 이상하면 공격을 하게 되는데, 종종 내 몸의 세포들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한다. 자가 면역 반응이 그것이다. 또 우리는 먹어야 사는데 먹는다는 건 내 몸 바깥에 있는 외부자를 내 몸 안에 끌어들여 소화하는 것이다. 이 역시 외부자인데, 이걸 면역계가 공격하는 경우가 있다. 알레르기가 그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강하면 자기 몸을 상하게 된다.
‘환상사지’와 ‘환상통’이라는 병도 바로 이런 자아의 기능 때문에 발생한다. 사고나 병으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했음에도, 잘려 나간 다리나 팔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환상사지’라 하고, 많은 경우 사고 때의 고통스러운 감각이 계속되는 것을 ‘환상통’이라 한다. 환자는 자기 팔이나 다리가 없음을 잘 안다. 그래도 그 감각과 고통은 그대로 지속된다. 정말 난감한 것은 아픈 팔이나 다리가 없기 쉽게 이해되는 것만 알고 편히 살면 뇌가 빠르게 고정성을 갖게 되면서 ‘자아’가 강해져 빨리 늙는다.
때문에 치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10년, 20년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환상사지를 연구하고 치료하기도 했던 의사 라마찬드란에 따르면, 환상사지는 자기 몸을 하나의 전체로 유지하기 위해 전체 상을 형성하고 기억하는 자아가 만들어낸다. 잘려 나가도 전체 상을 유지하려는 자아의 고집스러운 작용이다.
뉴런이라 불리는 뇌의 신경세포들은 매우 유연하다. 끊어지고 새로 잇고 하며 외부에서 입력되는 것을 맞추어 연결망을 바꾸어간다. 뇌의 이런 유연성을 ‘가소성’이라고 한다. 덕분에 시각피질이 소리를 듣기도 하고 한 부분이 손상되면 다른 부분이 대신 일을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유연하기만 한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연성은 줄어들고, 활동이나 사고의 양상이 일정하게 패턴화됨에 따라, 연결망은 축소되고 뇌의 작동은 ‘안정성’을 갖게 된다. ‘자아’가 형성된다 함은 이런 안정성이 매우 커진 상태를 뜻한다. 안정성은 언행이나 사고가 반복되면서 패턴화된 것인데, 그런 만큼 고정되고 굳어짐을 뜻한다. 다행히도 이런 안정성이 형성되는 것은 대체로 40~50대라고 하는데, 실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이 입력되지 않으면 안정성은 일찍부터 형성되고 뇌는 빠르게 굳어갈 것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게 입력되면 안정화되는 가운데서도 계속 변화하는 유연성을 갖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입력이 뉴런들의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모든 입력 정보들은 뉴런들의 연결망을 통해 적절한 반응을 산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는 행동한다. 이 연결망은 생후 1년 정도 때 최대라는데, 그걸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에너지가 매우 많이 소모되기에, 안 쓰는 것은 그 뒤에 연결을 끊는다. 그러니 쓰지 않고 그대로 두면 연결망은 점점 줄어들고, 그게 줄어들면 우리가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이해하려 애를 쓰면 없던 신경망도 새로 생겨난다.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어도 이는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충분히 많아도 늙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힘이 들고 에너지도 많이 소모된다. 어려운 책 읽는 게 힘든 것은 이 때문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걸 받아들이는 게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힘들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생리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다. 힘들게 살아야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듦에 따라 힘이 부족해지고, 그에 따라 힘든 걸 피하고 편안하게 살려는 성향이 생겨나는 것 역시 생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늙기’ 쉽다. 힘든 걸 하지 않으려니 낯선 것, 새로운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입력하려 하지 않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것만 알고 사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편히 살면 빨리 늙는다! 이렇게 살면 ‘자아’라고 부르는 안정성이 빠르게 형성되고, 뇌는 빠르게 고정성을 갖게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단단하게 경화된다. ‘강한 자아’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자아가 이렇게 강해지면, 자아가 이미 갖고 있는 것, 즉 자아의 동일성 바깥에 있는 것은 이제 강하게 쳐내게 된다. 새로 입력되는 게 있어도 얼른 흘려 내보낸다. 그게 편히 사는 길이니까.
이로써 뇌의 ‘안정성’은 더 강화되고 뇌는 더욱 단단해진다. 뇌의 안정성과 자아가 서로 되먹임되며 서로를 강화하는 양의 되먹임 루프가 형성된다. 그렇게 되면 입력 장치는 있어도 작동하지 않게 되고, 아무리 입력해도 입력되지 않는다. 그래도 말하고 행동해야 하니 기존에 있던 것만 출력하게 된다. ‘늙음’에 대한 기계적 상태는 뇌와 자아가 서로를 경화시켜가는 이런 되먹임 프로세스의 외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자아가 강해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다음의 사실 또한 명확하다 하겠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이진경|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를 철학하다』,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역사의 공간』, 『삶을 위한 철학 수업』 등이 있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생물학적 기능이 크게 저하되는 것을 ‘노화’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다들 두려워하는 사태다. 그걸 피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노화 방지(anti-aging)를 연구하고, 노쇠 현상을 가리는 수많은 방법을 사용한다. ‘늙음’이나 ‘노화’가 마치 질병이라도 되는 것 같다.
한국에선 나이 많은 분들을 ‘어르신’이라며 최대치로 높인 말로 칭하지만, 그 ‘어르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르신’은 정말 경칭(敬稱)일까? 나이가 좀 든 연후에는 누가 나이 물으면 ‘실례’라고 비난한다. 나이 든 상태에 존경의 지향성이 담겨 있다면, 그걸 확인하는 걸 실례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
늙음은 어쩌다가 이렇게 피하고 싶은 ‘질병’ 같은 게 되었을까? 물론 생물학적 능력의 저하가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사실만으론 이처럼 감추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게 되지 않는다. 가령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조차, 때로는 더할 수 없는 철학적 미덕이나 미학적 아름다움으로 상찬되지 않는가!
현대 철학의 개념을 살짝 빌려다 말하자면, 늙음이란 단지 생물학적 상태를 표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기계적 상태’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입력 장치는 고장나고 출력 장치만 가동되는 상태, 그게 바로 늙음이다. 귀로든 눈으로든 새로운 걸 아무리 입력해도 소용없다. 그냥 흘러나가버리거나 금방 잊는다. 그리곤 언제나 하던 말을 반복하고 하던 행위를 반복한다. 들으려 하지 않고 말만 하려 하니, 하는 말은 대개 ‘우기는’ 게 되기 십상이고, 배운 게 없어도 ‘장유유서’는 알고 ‘어르신’이란 말로 추켜세워주니, 언제나 ‘가르치려’ 들기 마련이다.
늙었다는 게 이런 기계적 상태라 함은 늙었다는 말이 단지 나이와 그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나이가 40대여도 입력 장치가 고장나고 출력 장치만 가동되며, 뭔가 배우고 공부하려 하지 않으면, 더구나 자신이 아는 걸로 가르치려 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충분히 ‘늙었다’고 해야 한다. 남보다 높은 지위에 있어서 남을 부리고 명령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일찍 ‘늙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에게 시킬 권리가 확고하다 보니, 남 얘기 듣고 그 사람 눈치 볼 일 없으니, 입력 장치는 점점 무력화되고 출력 장치만 강화되기 십상이니. 이런 분들은 얼굴마저도 딱딱해진다. 딱딱함이란 ‘경화’를 표현하는 말이고, 경화란 생물학적으로도 늙음의 확실한 징표다.
늙음은 단지 생물학적 상태가 아니다. 그렇기에 늙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대면해야 하는 어떤 기계적 상태에 대한 반응이다. 어떤 얘기를 해도 거의 입력되지 않고 하던 얘기만 반복해서 출력하는 기계라면, 아무리 훌륭한 엔지니어라도 다루기 어렵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기계’처럼 고장났다며 폐기할 수도 없다. 출력 결과에 반하는 대응을 하면 화를 내거나 강요의 언행이 다시 출력되니, 그래서도 안 된다. 반대로 ‘장유유서’의 도덕을 들이대며 출력한 바에 충실히 따라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늙음이란 생물학적 상태보다 훨씬 난감한 ‘질병’이다. ‘늙었다’는 말은 생물학적 상태와 구별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생물학적 상태와 독립적으로 이런 기계적 상태가 출현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유기체의, 어쩌면 자연스럽다 할 방어기제 때문에 나타난다. ‘자아’가 바로 그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의 몸은 60조 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는 여러 세포소기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세포는 박테리아들의 공생체다. 우리 몸은 그런 공생체들이 수십조 개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체다. 말 그대로 ‘중생(衆生)’이다.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서로 협조하며 공생하지만, 신체의 각 부분이 동일한 의지를 갖고 동일한 방식으로만 살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이다. 신체 안의 각 부분들을 유기체 전체의 의지에 따라 통합해 하나처럼 움직이게 지휘하는 것이 자아다. 외부에서 오는 진입자들을 식별해 유기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쳐내고 방어하는 것도 자아의 작용이다. 면역계가 바로 그것이다. 세포도, 기관도 독자적 생명체에서 나온 것이니 나름의 식별 능력이 있지만, 인간이 갖는 의식은 유기체 전체를 ‘나’라고 믿는 자아에 속한다.
그렇기에 자아는 변화하는 자기 신체 내부의 미시적 움직임에 최대한 동일성을 부여하려 하고, 외부에서 오는 변화에 대해서도 자신을 동일하게 유지하려 한다. 흔히 ‘정체성’이라 번역되는 아이덴티티(identity)는 정확히 자기의 ‘동일성’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나름 생존에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지만, 이게 너무 강하면 생존에 치명적인 병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알레르기, 그리고 류머티즘 같은 자가 면역 반응이다. 면역 반응은 내 몸에 속한 것과 바깥에서 침투한 것을 식별해, 외부자를 공격하는 반응이다. 그런데 자아의 식별 작용이 강한 경우, 약간만 이상하면 공격을 하게 되는데, 종종 내 몸의 세포들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한다. 자가 면역 반응이 그것이다. 또 우리는 먹어야 사는데 먹는다는 건 내 몸 바깥에 있는 외부자를 내 몸 안에 끌어들여 소화하는 것이다. 이 역시 외부자인데, 이걸 면역계가 공격하는 경우가 있다. 알레르기가 그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강하면 자기 몸을 상하게 된다.
‘환상사지’와 ‘환상통’이라는 병도 바로 이런 자아의 기능 때문에 발생한다. 사고나 병으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했음에도, 잘려 나간 다리나 팔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환상사지’라 하고, 많은 경우 사고 때의 고통스러운 감각이 계속되는 것을 ‘환상통’이라 한다. 환자는 자기 팔이나 다리가 없음을 잘 안다. 그래도 그 감각과 고통은 그대로 지속된다. 정말 난감한 것은 아픈 팔이나 다리가 없기 쉽게 이해되는 것만 알고 편히 살면 뇌가 빠르게 고정성을 갖게 되면서 ‘자아’가 강해져 빨리 늙는다.
때문에 치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10년, 20년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환상사지를 연구하고 치료하기도 했던 의사 라마찬드란에 따르면, 환상사지는 자기 몸을 하나의 전체로 유지하기 위해 전체 상을 형성하고 기억하는 자아가 만들어낸다. 잘려 나가도 전체 상을 유지하려는 자아의 고집스러운 작용이다.
뉴런이라 불리는 뇌의 신경세포들은 매우 유연하다. 끊어지고 새로 잇고 하며 외부에서 입력되는 것을 맞추어 연결망을 바꾸어간다. 뇌의 이런 유연성을 ‘가소성’이라고 한다. 덕분에 시각피질이 소리를 듣기도 하고 한 부분이 손상되면 다른 부분이 대신 일을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유연하기만 한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연성은 줄어들고, 활동이나 사고의 양상이 일정하게 패턴화됨에 따라, 연결망은 축소되고 뇌의 작동은 ‘안정성’을 갖게 된다. ‘자아’가 형성된다 함은 이런 안정성이 매우 커진 상태를 뜻한다. 안정성은 언행이나 사고가 반복되면서 패턴화된 것인데, 그런 만큼 고정되고 굳어짐을 뜻한다. 다행히도 이런 안정성이 형성되는 것은 대체로 40~50대라고 하는데, 실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이 입력되지 않으면 안정성은 일찍부터 형성되고 뇌는 빠르게 굳어갈 것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게 입력되면 안정화되는 가운데서도 계속 변화하는 유연성을 갖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입력이 뉴런들의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모든 입력 정보들은 뉴런들의 연결망을 통해 적절한 반응을 산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는 행동한다. 이 연결망은 생후 1년 정도 때 최대라는데, 그걸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에너지가 매우 많이 소모되기에, 안 쓰는 것은 그 뒤에 연결을 끊는다. 그러니 쓰지 않고 그대로 두면 연결망은 점점 줄어들고, 그게 줄어들면 우리가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이해하려 애를 쓰면 없던 신경망도 새로 생겨난다.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어도 이는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충분히 많아도 늙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그러려면 힘이 들고 에너지도 많이 소모된다. 어려운 책 읽는 게 힘든 것은 이 때문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걸 받아들이는 게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힘들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생리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다. 힘들게 살아야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듦에 따라 힘이 부족해지고, 그에 따라 힘든 걸 피하고 편안하게 살려는 성향이 생겨나는 것 역시 생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늙기’ 쉽다. 힘든 걸 하지 않으려니 낯선 것, 새로운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입력하려 하지 않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것만 알고 사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편히 살면 빨리 늙는다! 이렇게 살면 ‘자아’라고 부르는 안정성이 빠르게 형성되고, 뇌는 빠르게 고정성을 갖게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단단하게 경화된다. ‘강한 자아’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자아가 이렇게 강해지면, 자아가 이미 갖고 있는 것, 즉 자아의 동일성 바깥에 있는 것은 이제 강하게 쳐내게 된다. 새로 입력되는 게 있어도 얼른 흘려 내보낸다. 그게 편히 사는 길이니까.
이로써 뇌의 ‘안정성’은 더 강화되고 뇌는 더욱 단단해진다. 뇌의 안정성과 자아가 서로 되먹임되며 서로를 강화하는 양의 되먹임 루프가 형성된다. 그렇게 되면 입력 장치는 있어도 작동하지 않게 되고, 아무리 입력해도 입력되지 않는다. 그래도 말하고 행동해야 하니 기존에 있던 것만 출력하게 된다. ‘늙음’에 대한 기계적 상태는 뇌와 자아가 서로를 경화시켜가는 이런 되먹임 프로세스의 외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자아가 강해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다음의 사실 또한 명확하다 하겠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이진경|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를 철학하다』,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역사의 공간』, 『삶을 위한 철학 수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