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 스님의 무상·무아·열반을 깊이 보는 수행|나는 누구인가

2024-04-24
무상·무아·열반을
깊이 보는 수행

틱낫한 스님
불교 지도자


실재의 문을 여는 열쇠는 무상・ 무아의 지혜
붓다의 수행법에는 삼법인(三法印)이라는 본질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중요한 법률 문서에 증인의 서명이 있는 것처럼 붓다의 정법 수행은 이 세 가지 가르침의 인장을 담고 있다.

첫째 무상 법인은 한 찰나에서 다음 찰나까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고 따라서 고정된 자아도 없다는 것이다. 무상의 가르침에는 불변의 자아가 없기에 이를 둘째인 무아 법인이라 부른다.

셋째 열반 법인은 모든 개념과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열반’은 ‘모든 개념의 소멸’을 의미한다. 무상을 깊이 보면 무아를 발견하고, 무아를 알면 열반을 안다. 열반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다.

무상의 지혜로 모든 개념을 초월하다
무상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변화하고 치유되고 해방될 수 있다. 만물은 찰나마다 변화하지만 한 물건은 한 찰나 전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어제 목욕했던 강물에서 오늘도 목욕을 한다면 그 물은 같은 물인가? 그 물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강물이지만 그럼에도 강은 여전히 같은 강이다.

무상의 지혜로 우리는 개념을 넘어서고 ‘같다-다르다’를 넘어선다. 강물이 같은 강물이 아니나 다른 강물도 아님을 안다. 잠들기 전 침대 옆 탁자에 켜놓은 촛불이 다음 날 아침 촛불과 같지 않음을 안다. 이 촛불은 두 개의 불이 아니나, 또한 한 개의 불도 아니다.

무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다
변화와 무상은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기도 하다. 무상 덕분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가능하다. 옥수수 한 알이 무상하지 않다면 그 한 알에서 옥수수 한 자루가 나올 수 없다.

무상은 또 연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항상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만물이 변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무상의 실천과 수행
무상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이해를 진정한 이해라 볼 수는 없다. 지성만으로는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 깨달음에 이르지도 못한다. 안정된 마음으로 집중할 때 깊이 보기를 수행할 수 있다. 깊이 보기로 무상을 볼 때 이 심오한 지혜에 집중할 수 있다. 그때 무상의 지혜가 내 존재의 일부가 된다. 나날의 체험이 된다. 무상의 지혜를 늘 지녀 언제나 무상을 보고 무상을 삶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무상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 수행하면 이해가 자라난다. 매일 내 안에서 무상이 살아 있게 된다. 이 수행을 통해 무상은 실재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무상의 눈으로 감정 보기
누군가 한 말에 화가 치밀고 그 사람이 꼴도 보기 싫을 때 무상의 눈으로 깊이 보기를 수행해보라. 그가 가고 나면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행복한가, 울고 있는가? 이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게송이 있다.

화가 난 나는 궁극의 차원에서
눈을 감고 깊이 보기를 수행하네.
앞으로 300년이 지난 후
너는 어디에 있고 나는 어디에 있을까?

무상의 눈으로 화를 바라보면 바로 멈추고 호흡할 수 있다. 서로에게 화가 난 우리는 눈을 감고 궁극의 차원에서 깊이 보기를 수행한다. 300년 후 미래가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이고 너는 어떤 모습일까? 너는 어디에 있고 나는 어디에 있을까? 단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의 미래, 그의 미래를 본다. 300년까지 갈 것도 없다. 50~60년만 지나도 두 사람 다 세상을 떠나고 없을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볼 때 그가 매우 소중한 사람임을 볼 수 있다. 그를 안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어서 참 좋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화를 내겠어요. 우리 두 사람 다 언젠가 죽을 테지요. 살아 있는 동안 서로에게 화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군요.”

무아
무상은 시간의 관점에서 실재를 바라보는 것이고, 무아는 공간의 관점에서 실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무상과 무아는 실재의 양면이다. 무아는 무상이 드러난 것이고, 무상은 무아가 현현한 것이다. 만물이 무상하다면 개별적 자아가 없는 것이다. 사물에 개별적 자아가 없다면 사물이 무상함을 의미한다. 무상은 사물이 찰나마다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실재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항상한 자아나 개별적 자아가 있을 것인가? ‘자아’라 말할 때 우리는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무엇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우리의 몸은 무상하고, 감정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다. 우리의 화, 슬픔, 사랑, 증오도 무상하고 의식 역시 무상하다.

지금 이 글이 담긴 종이 역시 개별적 자아가 없다. 오직 구름, 숲, 태양, 흙, 종이 만드는 사람들과 기계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종이도 없다. 그리고 이 종이를 태우면 종이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무언가 다른 것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을 연결되어 존재한다고, 연기라고 말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연결되어 존재함을 의미한다. 종이는 태양과 숲과 연결되어 존재한다. 꽃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흙, 비, 잡초,곤충과 함께 연결되어 존재한다. 개별적 존재(being)는 없다. 오직 연결되어 존재할(inter-being) 뿐이다.

한 송이 꽃의 출현을 돕기 위해 전 우주가 힘을 보탰다. 꽃을 깊이 보면 꽃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꽃은 만물이 가득한 존재라고 묘사할 수 있다. 꽃 속에 현존하지 않는 것은 없다. 꽃 속에는 햇빛이 있고, 비가 있고, 구름이 있고, 땅이 있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있다. 한 송이 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꽃이 아닌 모든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우주 전체가 나섰다. 꽃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단 하나 없는 것은 바로 개별적 자아, 개별적 정체성이다.

무아는 또한 공을 의미한다. 공성은 개별적 자아가 없음을 의미하는 불교 전문 용어다. 나는 무아의 성질을 가졌으나 그렇다 해서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무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유리잔은 비어 있거나 아이스티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지만, 비어 있든 가득 차 있든, 유리잔이 거기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성(비어 있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존재함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공성은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 공성의 본성을 깊이 접하면, 즉 무아와 연결되어 존재함을 깊이 접하면, 바로 열반을 궁극적 차원을 접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몸을 자아로 여기고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몸을 ‘나’, ‘내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깊이 보면 내 몸은 내 조상들의 몸, 내 부모의 몸, 내 자녀들의 몸, 내 손자들의 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몸은 ‘나’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다. 내 몸은 다른 모든 것들로 가득하다. 몸이 아닌 무한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오직 하나만 빠져 있으니 바로 개별적 존재이다.

무상은 공성의 측면에서, 연기와 무아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공성은 훌륭하다. 2세기 저명한 불교 스승인 나가르주나는 말했다. “공성 덕분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무상은 시간의 시각에서 본 무아이고, 무아는 공간의 시각으로 본 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같다. 그러므로 무상과 무아는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무아 속에서 무상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무아가 아니다. 무상 속에서 무아를 보지 못하면 그것은 무상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상 속에서 열반을 보아야 하고, 무아 속에서 열반을 보아야 한다. 만약 선을 긋는다면 한쪽에는 무상과 무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열반이 있을 것이다. 이 가름 선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해에 도움이 된다. 열반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아와 무상의 개념조차도 넘어서는 것이다. 무아 속에 열반을 두고, 무상 속에 열반을 둔다면 우리는 무아나 무상이라는 개념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열반
무상과 무아는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부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다만 실재의 문을 여는 열쇠일 뿐이다. 항상의 개념은 오류이고 따라서 무상의 가르침으로 항상의 관점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무상의 개념에 매이게 되면 열반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다. 자아의 개념은 오류다. 그를 수정하기 위하여 무아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의 개념에 얽매이면 그 역시 좋지 않다. 무상과 무아는 수행의 열쇠일 뿐 절대 진리가 아니다. 무상과 무아를 위해 우리는 죽지도 살생을 하지도 않는다.

불교에는 그를 위해 살생을 해야만 하는 개념도 편견도 없다. 불교를 수용하지 않는다 해서 그런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은 슬기로운 방편이지 절대 진리가 아니다. 따라서 무상과 무아는 진리에 닿을 수 있는 슬기로운 방편이라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은 말씀했다. “내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이 달이라는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 손가락 때문에 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아와 무상은 진리를 이해하는 수단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무상과 무아는 도구일 뿐 궁극의 진리가 아니다. 무상은 그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교리가 아니다. 무상에 반기를 든다 해서 누군가를 감옥에 가두어선 안 된다. 그리하면 개념으로 개념을 반대하는 것이다. 무상과 무아는 절대 진리로 이끌어주는 수단이다. 불교는 우리를 돕는 지혜로운 길이지 광신도의 길이 아니다.

무상이 그 안에 열반의 성품을 지녔기에 우리는 개념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할 때 항상과 무상을 포함한 모든 개념과 생각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이것이 바로 열반이고 천국이다.

개념의 소멸
열반은 모든 개념과 생각의 소멸을 의미한다. 개념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참 자성의 평화로움과 접할 수 있다.

우리의 두려움에 연료를 공급하는 여덟 가지 개념이 있다. 바로 태어남과 죽음, 오고 감, 같음과 다름,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이다. 이 개념들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이 개념들을 중화시키는 가르침을 ‘팔불(八不)’이라 부른다. 바로 태어남과 죽음이 없음[불생불멸(不生不滅)], 가고 옴이 없음[불거불래(不去不來)], 같지도 다르지도 않음[불일불이(不一不異)], 존재도 비존재도 없음[부단부상(不斷不常)]이다.

행복의 개념에 안녕 고하기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행복의 방법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여기서 행복의 개념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목록을 만들어보라.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들을 적어놓고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보라. 이것이 실재인가 개념인가? 특정 개념의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행복의 기회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행복은 여러 방향에서 도래한다. 오직 한 방향에서만 행복이 온다고 여기면 다른 기회들을 놓쳐버린다. 우리는 말한다. “그녀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내 직장과 명성을 잃어버리느니 죽어버릴 테야. 그 학위, 그 승진을 얻지 못하면, 그 집을 사지 못하면 나는 행복할 수 없어.” 행복에 이렇게 많은 조건을 달면 그 조건이 다 충족된 후에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계속 다른 행복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더 높은 학위, 더 나은 직장, 더 좋은 집 등을 말이다.

정부 역시 국가를 번영시키고 행복하게 할 한 가지 방법을 신봉할 수 있다. 그 이념에 백여 년 매달리는 동안 국민은 많은 고통을 받는다. 정부에 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도 한다. 하나의 이념에 헌신하기 때문에 나라 전체를 감옥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행복의 개념이 위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부처님은 행복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러니 되돌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깊이 점검해보라. 그러면 행복의 조건이 이미 내 삶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 순간행복은 즉시 내 것이 된다.

번역, 정리|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 이 리뷰는 『라이언스 로어』 2017년 겨울호에 실린 틱낫한 스님의 글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틱낫한 스님(1926~2022)
베트남 출신의 스님이며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가다. 프랑스 보르도에 수행 공동체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세우고 명상 공동체 활동을 이끌었으며, 2018년 11월 베트남으로 영구 귀국했고 2022년 입적했다. 1995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화』, 『틱낫한 스님의 마음 정원 가꾸기』,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 『힘』, 『화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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