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의 비구도 없었던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불교 발달사

불교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동남아시아 불교



스리랑카 불교

등현 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 원장




불교는 크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두 갈래로 나뉜다. 남방불교는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졌고, 스리랑카에서 다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북방불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전자를 남방불교 혹은 상좌불교라 하고, 후자를 북방불교 혹은 대승불교라 한다. 상좌불교는 팔리어 경전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개인의 깨달음과 열반 추구에 중점을 둔다.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 등이고, 불자(佛子)수가 전 세계적으로 1억 명이 넘는다. 특히 스리랑카는 역사적으로 남방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스리랑카 불교의 위기와 전승
스리랑카 전승인 『마하방사(Mahavamsa, 大史)』에 따르면 아소카왕은 사미승 니그로다(Samanera Nigrodha)의 충고를 받아들여 불교로 개종한 후 전쟁과 학살을 멈추게 된다. 아소카왕은 승가를 후원하고 이단을 축출함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그로 인해 아소카왕은 인근 국가들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알려지게 된다. 아소카왕은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인도 안팎으로 9개국에 스님들을 파견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친아들 마힌다(Mahinda) 장로와 친딸 상가밋따(Saṅghamitta)를 보냈다.

아소카왕이 9개의 다른 지역으로 포교사들을 파견한 것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에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힌다 장로에게 귀의한 스리랑카 왕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는 아누라다뿌라에 ‘대사(大寺)’를 건립한다. 그리고 왓따가마니 아바야왕의 귀의를 받은 마하띳사 장로는 왕이 바친 무외산사(無畏山寺)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펼친다.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의 승려들은 인도의 대승불교 종파들에 호의적이어서 독자부(犢子部)의 장로 담마루치(Dammaruci)와 방광부(方廣部, Vetullavadā)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된다.

역대 왕들은 주로 무외산사파를 지지했다. 특히 마하세나(Mahāsena, 재위 334~361)왕은 대사파를 탄압했고 이후 오랫동안 무외산사파는 왕실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무외산사파는 또한 인도 칼링가(Calinga)에서 불치(佛齒)를 받아와 왕실의 권위를 종교적으로 강화했다. 반면 위기에 처한 대사파는 왕실의 후원 없이 삼장(三藏)과 주석들을 싱할라어로 서사했으며, 종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마하방사』를 저술했다. 마하나마(Mahānāma, 재위 409~431)왕 때는 인도 출신인 붓다고사(佛音, Buddhaghosa)를 받아들여 싱할라어 삼장과 주석들을 팔리어로 번역한다. 3세기 중엽 고타바야왕 때에 이르러서는 ‘남사(南寺)’가 독립하게 된다. 남사 파는 후에 ‘제따와나 위하라(祇陀林寺)’라고도 불렸으며,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크게 번성한다. 반면에 대사파는 점점 그 세력을 잃고 암흑기를 맞게 되는데, 12세기에 이르러서야 파락카마 바후왕이 승단을 상좌불교 중심으로 ‘정화’한다. 바후왕은 대승불교와 밀교 등을 ‘이단’으로 선포하고 축출해버린다. 이 왕조는 12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인근 국가들에 적극적으로 상좌불교를 알리게 된다.

그 후 스리랑카는 450여 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네덜란드(1658~1796)와 영국(1796~1948)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포르투갈은 싱할리인들을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고, 신생아들의 호적을 교회에 등재하도록 강요했다. 식민 치하에서 스리랑카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게 되고, 그 결과로 불교 사원은 피폐해지고 수계마저 끊기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1753년 태국의 승려들에 의해 끊긴 수계가 이어진 후 현재 스리랑카 승단들 중 대부분은 시얌파(Siyam Nikāya)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일부 미얀마에서 수계를 이어온 승단들도 지속되고 있다.

서구 열강 중 특히 영국은 스리랑카 전 지역을 점령했는데, 이는 스리랑카 국민이 교육과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지배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국가 상실의 위기에서 불교적 신앙과 삶의 방식, 그리고 국가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에 일부 승려들은 선교사들에게 승원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고 경전을 빌려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식민정부는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은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도 전통 승원의 학교들은 인가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 학교들은 영어를 가르쳤기에 졸업생들은 정부 관료 체계에 들어가기가 수월했다. 이런 상황에서 싱할라 불교도들은 기독교와 불교, 전통적 교육과 근대적 교육, 이 두 가지를 놓고 선택해야만 했다.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으로 국민의 70%가 불교 인구로 회복
이때 불교를 지켜내고자 하는 불자들이 속속 나타난다. 먼저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의 복음협회를 모방해 1862년 불교협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선교 문헌 내용을 반박하는 글을 발간하게 된다. 문헌을 통한 양측의 논쟁은 1873년 콜롬보 남쪽의 파아나두라(Pānadura)에서 있었던 네 차례에 걸친 논쟁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때 구나난다는 기독교를 반박하고 불교의 우월성에 대해 여러 주장을 펼쳤다. 파아나두라 논쟁은 역사적으로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교도들은 이 논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했으며,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우월성이 확증되었다고 믿었다. 당시 논쟁의 기록은 신문을 통해 영어와 싱할라어로 전 세계로 전해졌다.

신지학회의 올코트는 파아나두라 논쟁의 영어판을 접한 후 “불교가 기독교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스리랑카로 가서 삼귀의(三歸依)를 하고 오계(五戒)를 받았다. 영국인 맥그레거는 마이트레야(Ānanda Maitreya)라는 법명으로 버마의 승단에 들어갔으며, 독일의 귀트(Anton Gueth)는 랑군에서 냐나틸로카(Ñyāṇatiloka)라는 이름으로 출가했다. 냐나틸로카는 스리랑카에서 수행하면서 불교와 관련한 여러 문헌을 유럽에서 출판했다. 서구인들이 미신으로 폄하해오던 불교를 서양인이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직접 귀의까지 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자긍심을 잃어가던 싱할라 불교도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리즈 데이비스가 스스로를 “불교도”라 칭하고 쇼펜하우어(1788~1860)는 불교를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상의 종교”라고 찬사했다. 이에 힘입어 싱할리인 아나가리까 담마팔라는 인도에 대각회를 세우고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불교를 널리 알렸다.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오늘날 스리랑카 국민 70%가 불교 인구로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결정적 힘이 되었다.

한때 절정을 달리던 스리랑카 불교가 450년간 이어진 식민 지배에서 박해를 받아 수계를 전할 단 5명의 비구도 없었다. 그러한 절멸의 상태에서도 전 세계에 불교를 홍포(弘布)한 스리랑카 불교도들의 노력이 오늘날 한국 불교에 작은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등현 스님
1993년부터 20여 년간 스리랑카·인도·미얀마 등지에서 수행하면서 빠알리어·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로 된 불교 원전을 공부했다. 이후 12개국 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태국 국제불교대학(International Buddhist College)에서 3년간 강의했다. 현재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중앙승가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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