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불교의 전래와 정착
- 국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호성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외교적 선물’이자 ‘불교 문명’으로 538년 백제 성왕 때 일본에 불교 처음 전해져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538년이다. 사료에 따라서 552년이라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불상과 경전을 보낸 것이다. 성왕을 일본 측 사료에서는 성명왕(聖明王)이라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민간에서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사료에 남아 있는 공식적인 전래가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치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종교는 정치에 많이 기대어서 발전을 도모했다. 그런 맥락에서 불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라는 맥락에서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도 그러했다. 백제로부터 불상이나 경전이 전해진 것 역시 일종의 ‘외교적 선물’이었다.
그렇게 외교적 선물이 될 수 있었음은 불교가 종교의 범주를 넘어서 하나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불교 문명’이었다.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이 불교와 섞여 있었다. 그렇게 섞여서 들어오고, 또 다른 나라로 들어갔다.
일본, 죽음의 문제 등 왕실의 안녕에 이바지해주길 기대하며 불교 수용
불교, 내지 불교 문명을 받아들이는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수용의 주체는 왕실이었다. 왕실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불교에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심을 달래거나 교화하거나 하는 역할을 불교에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왕실의 안녕에 이바지해달라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으로 죽음의 문제가 있었다. 왕도 오래 살았으면 싶고, 왕비나 왕자들도 오래 살았으면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죽고 사는 문제를 어찌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죽음은 인간의 한계 밖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의술 발전을 위해서도 나름으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의술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죽음은 의술의 영역만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 공인 관사와 관승 중심의 ‘관승 불교’, ‘국가 불교’…
“민간에 대한 포교는 금지한다”는 규정
불보살에게 기도를 해서 무병장수를 원했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기도를 통해서 치병을 시도하는 것은 과학은 아니다. 과학이 아니기에 불교가 필요했다. 그런 역할을 해주는 정도로 불교에 대한 수요를 일단 한정했다. 국가에서 공인하는 정도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스님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절은 나라에서 예산을 들여서 세우고 고치고는 했다. 관사(官寺)다. 관사에서 살면서 기도 소임을 담당하는 스님들은 관승(官僧)이다. 관승의 숫자는 왕실에서 정해준다. 1년에 몇 명까지 가능한지 통제하는 것이다. 그 정원을 연분도자(年分度者)라고 한다. 승려 증명서인 도첩(度牒)을 얻는 사람의 숫자를 큰 사찰마다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님들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예산 지원을 해준다.
그러면서 부정(不淨) 탈 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민간의 백성을 접하다 보면, 자칫 부정 탈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701년에 제정된 「승니령(僧尼令)」에서는 애당초 “민간에 대한 포교는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의 불교를 ‘관승 불교’라고 하는데, ‘국가 불교’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적으로 득도한 ‘사도승’, 관승으로부터 이탈한 ‘둔세승’ 등장하며
일본 불교 주류가 되다
그런데 정말 불교가 그런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불교의 목표는 일체중생의 제도에 있지 않던가. 아무리 왕실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수용했다 하더라도, 차차 불교가 민간에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불교를 접하고서 신심이 일어나서 출가를 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관승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정원(定員)도 적었고, 시험도 쳐야 한다. 『법화경』과 『금광명경』과 같은 호국 불교의 경전을 외워야 한다. 과히 좁은 문(門)이었다.
할 수 없이 스스로 스님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국가 공인 스님’은 아니다. 사적으로 득도(得度)했다고 해서 ‘사도승(私度僧)’이라 한다. 일종의 ‘무허가 스님’이었다.
사도승의 존재는 어디에도 있었다. 중국에도 우리나라 역사에도 있었다. 이 사도승이 민간인에 대한 포교를 담당했다. 여러 가지 사회복지사업 같은 것도 행했다. 그러다 보니 민간의 신뢰도 얻었다. 사도승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도승의 세력이 커진다. 나라(奈良) 시대 때 쇼무(聖武, 701~756) 임금은 도다이지(東大寺)에 대불(大佛)을 조성하는 불사를 추진했다. 나라에서 임금이 나서서 하는 불사지만 예산 부족에 시달렸다. 할 수 없이 임금은 당시 사도승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교키(行基, 668~749) 스님에게 SOS를 친다. 교키 스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대작 불사가 원만히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관승 불교에 대한 이탈은 또 있다. 부처님 법의 본질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관승이 되었으나, 관승의 길에서 이탈하는 스님들이 나온다. 관승이 되는 것이 1차의 출가라고 한다면, 관승으로부터 다시 이탈하는 것은 2차의 출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관승으로부터 이탈하는 스님을 ‘둔세승(遁世僧)’이라 불렀다. 지금 일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이 둔세승의 불교 전통이다.
처음 불교를 수용할 때, 왕실이 주체가 되어 수용했기에 국가 불교적 성격이 강한 것은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로 그러한 구조 밖에 존재하는 스님들의 존재가 일본 불교사를 찬란하게 수놓았다. 하나는 사도승이고, 다른 하나는 둔세승이다. 관승 불교가 국가 불교라고 한다면, 사도승과 둔세승의 불교는 민중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 불교에서 가장 큰 종파들은 모두 가마쿠라 시대에 나온
둔세승들의 교단…에도 시대 모든 불교계가 다시 국가 시스템에 편입되기도
일본 불교의 역사는 이들 두 계통의 흐름이 교차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고려 시대 후기와 겹치는 가마쿠라(鎌倉) 시대가 되면 둔세승이 일본 불교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류가 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일본 불교에서 가장 큰 종파들은 다 가마쿠라 시대에 나온 둔세승들의 교단이다. 그 선구자 역할은 호넨(法然, 1133~1212) 스님이 담당했다. 그는 가장 행하기 쉬운 ‘나무아미타불’을 민중에게 주었다. 그의 문하에서 정토종(淨土宗), 정토진종(淨土眞宗), 시종(時宗)이 나왔다. 이 중 신란(親鸞, 1173~1262) 스님을 개조로 모시는 정토진종이 오늘날 일본 불교 최대 종파가 되어 있다.
선불교의 수용과 법화 불교의 재흥(再興) 역시 가마쿠라 시대에 이루어진다. 선은 임제종과 조동종이 모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일본의 스님들이 당시의 송(宋)으로 유학을 해 선법을 이어온 것이다. 법화 불교의 수용은 일찍이 고대의 입당해 구법(入唐求法)한 천태종 스님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나, 니치렌(日蓮, 1222~1282)이 등장해 천태종 안에서 공존하던 선, 정토, 밀교, 계율 등을 다 배제하고 『법화경』만을 선택해 전수(專修)했다.
그러나 업(業)은 영향력이다. 관승 불교 내지 국가 불교의 저력은 쉽사리 죽지 않았다. 근세의 에도(江戶) 시대에는 다시 모든 불교계가 다 국가 시스템에 편입된다. 기독교 신앙을 금지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다 절에 호적 등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스님들은 또다시 ‘에도 막부의 관승’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생존해온 업은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이 전쟁으로 폭주할 때, 사실상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앞장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최초에 전래될 때의 업이 다양한 형태로 일본 불교의 역사에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앞으로 일본 불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켜보면서 우리 스스로도 한번 되돌아보기로 하자.
김호성|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붓쿄(佛敎) 대학, 고치(高知) 대학, 류코쿠(龍谷) 대학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으면서『일본불교사공부방』 발행 · 편집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대승 경전과 선(禪)』, 『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 『관세음보살이여 관세음보살이여』 등이 있다.
일본 불교의 전래와 정착
- 국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호성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외교적 선물’이자 ‘불교 문명’으로 538년 백제 성왕 때 일본에 불교 처음 전해져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538년이다. 사료에 따라서 552년이라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불상과 경전을 보낸 것이다. 성왕을 일본 측 사료에서는 성명왕(聖明王)이라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민간에서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사료에 남아 있는 공식적인 전래가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치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종교는 정치에 많이 기대어서 발전을 도모했다. 그런 맥락에서 불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라는 맥락에서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도 그러했다. 백제로부터 불상이나 경전이 전해진 것 역시 일종의 ‘외교적 선물’이었다.
그렇게 외교적 선물이 될 수 있었음은 불교가 종교의 범주를 넘어서 하나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불교 문명’이었다.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이 불교와 섞여 있었다. 그렇게 섞여서 들어오고, 또 다른 나라로 들어갔다.
일본, 죽음의 문제 등 왕실의 안녕에 이바지해주길 기대하며 불교 수용
불교, 내지 불교 문명을 받아들이는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수용의 주체는 왕실이었다. 왕실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불교에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심을 달래거나 교화하거나 하는 역할을 불교에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왕실의 안녕에 이바지해달라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으로 죽음의 문제가 있었다. 왕도 오래 살았으면 싶고, 왕비나 왕자들도 오래 살았으면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죽고 사는 문제를 어찌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죽음은 인간의 한계 밖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의술 발전을 위해서도 나름으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의술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죽음은 의술의 영역만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 공인 관사와 관승 중심의 ‘관승 불교’, ‘국가 불교’…
“민간에 대한 포교는 금지한다”는 규정
불보살에게 기도를 해서 무병장수를 원했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기도를 통해서 치병을 시도하는 것은 과학은 아니다. 과학이 아니기에 불교가 필요했다. 그런 역할을 해주는 정도로 불교에 대한 수요를 일단 한정했다. 국가에서 공인하는 정도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스님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절은 나라에서 예산을 들여서 세우고 고치고는 했다. 관사(官寺)다. 관사에서 살면서 기도 소임을 담당하는 스님들은 관승(官僧)이다. 관승의 숫자는 왕실에서 정해준다. 1년에 몇 명까지 가능한지 통제하는 것이다. 그 정원을 연분도자(年分度者)라고 한다. 승려 증명서인 도첩(度牒)을 얻는 사람의 숫자를 큰 사찰마다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님들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예산 지원을 해준다.
그러면서 부정(不淨) 탈 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민간의 백성을 접하다 보면, 자칫 부정 탈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701년에 제정된 「승니령(僧尼令)」에서는 애당초 “민간에 대한 포교는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의 불교를 ‘관승 불교’라고 하는데, ‘국가 불교’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적으로 득도한 ‘사도승’, 관승으로부터 이탈한 ‘둔세승’ 등장하며
일본 불교 주류가 되다
그런데 정말 불교가 그런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불교의 목표는 일체중생의 제도에 있지 않던가. 아무리 왕실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수용했다 하더라도, 차차 불교가 민간에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불교를 접하고서 신심이 일어나서 출가를 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관승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정원(定員)도 적었고, 시험도 쳐야 한다. 『법화경』과 『금광명경』과 같은 호국 불교의 경전을 외워야 한다. 과히 좁은 문(門)이었다.
할 수 없이 스스로 스님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국가 공인 스님’은 아니다. 사적으로 득도(得度)했다고 해서 ‘사도승(私度僧)’이라 한다. 일종의 ‘무허가 스님’이었다.
사도승의 존재는 어디에도 있었다. 중국에도 우리나라 역사에도 있었다. 이 사도승이 민간인에 대한 포교를 담당했다. 여러 가지 사회복지사업 같은 것도 행했다. 그러다 보니 민간의 신뢰도 얻었다. 사도승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도승의 세력이 커진다. 나라(奈良) 시대 때 쇼무(聖武, 701~756) 임금은 도다이지(東大寺)에 대불(大佛)을 조성하는 불사를 추진했다. 나라에서 임금이 나서서 하는 불사지만 예산 부족에 시달렸다. 할 수 없이 임금은 당시 사도승들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교키(行基, 668~749) 스님에게 SOS를 친다. 교키 스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대작 불사가 원만히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관승 불교에 대한 이탈은 또 있다. 부처님 법의 본질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관승이 되었으나, 관승의 길에서 이탈하는 스님들이 나온다. 관승이 되는 것이 1차의 출가라고 한다면, 관승으로부터 다시 이탈하는 것은 2차의 출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관승으로부터 이탈하는 스님을 ‘둔세승(遁世僧)’이라 불렀다. 지금 일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이 둔세승의 불교 전통이다.
처음 불교를 수용할 때, 왕실이 주체가 되어 수용했기에 국가 불교적 성격이 강한 것은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로 그러한 구조 밖에 존재하는 스님들의 존재가 일본 불교사를 찬란하게 수놓았다. 하나는 사도승이고, 다른 하나는 둔세승이다. 관승 불교가 국가 불교라고 한다면, 사도승과 둔세승의 불교는 민중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 불교에서 가장 큰 종파들은 모두 가마쿠라 시대에 나온
둔세승들의 교단…에도 시대 모든 불교계가 다시 국가 시스템에 편입되기도
일본 불교의 역사는 이들 두 계통의 흐름이 교차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고려 시대 후기와 겹치는 가마쿠라(鎌倉) 시대가 되면 둔세승이 일본 불교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류가 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일본 불교에서 가장 큰 종파들은 다 가마쿠라 시대에 나온 둔세승들의 교단이다. 그 선구자 역할은 호넨(法然, 1133~1212) 스님이 담당했다. 그는 가장 행하기 쉬운 ‘나무아미타불’을 민중에게 주었다. 그의 문하에서 정토종(淨土宗), 정토진종(淨土眞宗), 시종(時宗)이 나왔다. 이 중 신란(親鸞, 1173~1262) 스님을 개조로 모시는 정토진종이 오늘날 일본 불교 최대 종파가 되어 있다.
선불교의 수용과 법화 불교의 재흥(再興) 역시 가마쿠라 시대에 이루어진다. 선은 임제종과 조동종이 모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일본의 스님들이 당시의 송(宋)으로 유학을 해 선법을 이어온 것이다. 법화 불교의 수용은 일찍이 고대의 입당해 구법(入唐求法)한 천태종 스님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나, 니치렌(日蓮, 1222~1282)이 등장해 천태종 안에서 공존하던 선, 정토, 밀교, 계율 등을 다 배제하고 『법화경』만을 선택해 전수(專修)했다.
그러나 업(業)은 영향력이다. 관승 불교 내지 국가 불교의 저력은 쉽사리 죽지 않았다. 근세의 에도(江戶) 시대에는 다시 모든 불교계가 다 국가 시스템에 편입된다. 기독교 신앙을 금지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다 절에 호적 등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스님들은 또다시 ‘에도 막부의 관승’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생존해온 업은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이 전쟁으로 폭주할 때, 사실상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앞장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최초에 전래될 때의 업이 다양한 형태로 일본 불교의 역사에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앞으로 일본 불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켜보면서 우리 스스로도 한번 되돌아보기로 하자.
김호성|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붓쿄(佛敎) 대학, 고치(高知) 대학, 류코쿠(龍谷) 대학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로 있으면서『일본불교사공부방』 발행 · 편집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대승 경전과 선(禪)』, 『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적 이해』, 『관세음보살이여 관세음보살이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