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 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요즘 행복하시죠? 그렇죠?
이런 행복의 개념 여행을 다녀오면, 아주 자연스러웠던 물음인 “요즘 행복하세요?”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행복이 오가는 느낌에 좌우되는 그런 사회에 살아온 탓에 이 질문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선입견으로 가득 찬 질문이다. 먼저 이 질문은 행복에 요즘과 이전이라는 시간을 연결한다. 요즘 행복과 이전 행복을 구분해 질문하는 것은 행복에 관한 암묵적인 생각을 전제하는 것이다. 행복에 유효 기간이 있을까? 과거에는 불행했고 지금은 행복하다는 식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이 질문이 행복에는 시간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행복에 대한 오해를 조장한다. 행복의 개념 중에는 시간적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복은 순간순간의 느낌이 아니라 일생 전체를 놓고 내리는 평가의 의미로 생각하는 행복 개념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 개념에는 “요즘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런 개념에 따르면 행복에는 ‘요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행복에는 ‘예전에는’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나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이유는 행복이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느낌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관한 것이라서 이들이 행복한지는 이들이 나이가 들어 인생을 다 살아보아야 말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야구는 9회 말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은 인생을 다 살아보아야 알 수 있다는 입장을 담고 있는 행복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행복 개념을 참 이상한 것이라 생각할 분들이 많겠지만 이런 행복 개념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행복의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행복을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행복 개념을 공부하면 행복에 관한 이런 숨겨진 전제들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행복은 돈이 아니다. 그럴까?
행복의 다양한 모습을 알게 해주는 행복의 개념 여행이 주는 또 한 가지 장점은 행복의 다양한 조건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의 물질적 조건에 관해 생각해보자. 흔히 행복은 돈이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행복은 돈이 아니라는 말은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A가 B의 충분조건(sufficient condition)이라는 것은 A 하나만으로 B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돈만으로 행복이 가능한 것은 아니므로(복권 당첨자의 삶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돈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돈이 행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돈과 행복의 애매한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행복의 여러 개념 중에는 돈이 행복에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을 함축하는 개념들이 있다. 즉 돈 그 자체로 행복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행복하기가 어렵다. A가 B의 필요조건(necessary condition)이라는 것은 A가 없을 때 B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민이 됨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조건 한 가지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돈과 행복의 관계도 설명될 수 있다. 돈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충분조건 : 돈 있음 → 행복함
필요조건 : 돈 없음 → 행복하지 못함
결국 돈은 행복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적 건강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 할 만하다. 행복 조건들의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가 다양한 행복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자세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행복의 개념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다. 편안하고 익숙한 환경을 떠나 다른 행복의 개념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행복의 세계는 너무도 다양하다. 행복의 개념 여행을 한번 떠나보기로 하자.
변방 노인의 말(塞翁之馬)
동양사상에는 인생에 관해 지혜가 담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변방 노인이 기르던 말 이야기다. 중국의 변방 작은 마을에 한 노인이 살았다. 어느 날 그 노인은 그가 아끼던 말이 한 마리 사라진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노인을 위로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리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며칠 후 놀랍게도 이 말은 다른 말을 데리고 노인이 사는 집에 나타났다. 집 나간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왔으니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노인은 그렇게 기쁘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얼마 후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나갔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노인은 지난 일과 마찬가지로 별 반응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마침 이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나 마을의 젊은이들이 군대로 징집을 당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이 노인의 아들은 마침 다리가 부러진 관계로 징집을 면하고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결국 말이 사라지고 돌아오고 아들이 다치고 징집을 면하고 하는 좋고 나쁜 일이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인생에 대한 깊은 관조가 이 이야기에는 깔려 있다.
이 이야기는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흔히 우리는 인생사는 새옹지마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말의 뜻은 이이야기에 나와 있듯이 인생살이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섞여 있어서 좋은 일이 있다고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고 나쁜 일이 있다고 특별히 슬퍼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축하와 위로에 대한 노인의 반응에서 이러한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이 이야기의 깊은 뜻을 인생살이의 시각에서 설명한다. 즉 인간의 길흉화복은 이야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외적인 조건과 운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쑥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변화에 대한 노인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좋은 일이 있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조금 나쁜 일이 있다고 슬퍼할 일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최고라는 겸손의 인생철학을 배울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담담한 숙명론, 조심스러운 관망론, 그리고 단정하지 않는 겸손이 깔려 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이 이야기에는 다소간 수동적 행복관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인의 태도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변방 노인이 변화무쌍한 운세를 경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완전히 휩쓸리지는 않는다.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담담하게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은 단순히 수동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노인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노인의 말(馬)은 예측할 수 없는 행운과 불운을 가지고 왔지만 변방 노인의 담담한 모습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배우고 또 익히는 적극적 행복
동양의 고전에는 매우 적극적인 인생관과 행복관이 피력된 것이 많다. 공자님의 말씀에는 놀랄 만할 정도의 적극성이 담겨 있다. 배우고 또 시간이 있을 때 그 배운 것을 익히고(溫故知新)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이상 자기성찰(一日三省)을 해 수양과 덕을 닦으라는 말씀은 그냥 앉아서 좋은 일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다. 공자님의 일생을 보면 공자님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논어의 한 구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공자님을 군사력이나 형벌이 아니라 덕(德,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격의 탁월함과 깊이)을 통한 천하의 평정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다 알면서도 끝까지 하려는 사람(是知其不可而爲之者)”이라고 칭한 것이 있다. 결코 이러한 내용을 보면 공자님의 인생관은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자님의 행복 철학은 진정 공부하고 노력하는 인생관이다.
『논어』의 첫 장 첫 구절이 “배우고 또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시작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독교의 구약이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과 너무 대조되는 이 구절은 바로 인생의 문제를 나의 노력의 진정성에서 시작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듬뿍 보인다. 그런데 그 진정성의 시작이 배우는 것에 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물론 지식의 습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잘 발전시키고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적극적인 자기 발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적 행복관을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유교 전통에서 나타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보면 모두 다른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 무인도에서 혼자 휴가를 무한정 즐기는 행복이 아니다. 형제부모와 잘 지내고 친구와 나누며 후학(혹은 후손)을 잘 지도하는 삶이 유교적 삶의 즐거움에는 반드시 등장한다. 결코 이기적 자기완성이 행복의 목표는 아니다. 또 공자님이 추천하는 자기 개발 과정을 보면 결코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옛 성인의 가르침을 익히고 음악과 시와 예술을 음미할 수 있는 자신을 기르는 것이 유교적 수양의 핵심이다. 이것은 유교가 서양의 자유 교양 교육(liberal arts education, 특정한 직업이나 기술이 아니라 전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 맥을 같이하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유교적 인생관은 적극적 삶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자신의 전인격의 완성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유교적 행복관은 적극적 자기 개발과 타인과 더불어 사는 인격 완성에서 나오는 성장감 혹은 성취감의 즐거움이다. 즉 세상적 성공이나 금전적 확정과는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의 인격이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번영 혹은 번성의 상태가 유교적 행복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성인과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잘 발전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유교적 행복감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적 전통에서는 그냥 앉아서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가 아니라 학이시습(學以時習)의 과정인 것이다. 새옹지마의 경우와 같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운(運, 외적인 조건)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장기적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온고지신의 성장 과정인 것이다. 물론 동양인의 사고에 새옹지마의 인생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새옹지마의 인생관을 수동적 행복관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새옹지마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을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겸손히 잘 관찰하고 이해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혜를 단순히 수동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새옹지마의 인생관이 적극적인 유교적 행복관과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행복의 개념 요소들
이러한 서로 대비가 되는 생각을 놓고 보면 동양사상이라고 해도 상당히 다른 행복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것을 놓고 대략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행복에는 매우 다른 종류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행복이라고 하는 한국어에는 대략 행(幸)이라고 하는 외적인 상황(운이 좋음, 즉 인간관계, 건강, 사업 또는 승진에서 외적인 흐름이 개인의 뜻과 잘 맞음)과 복(福)이라는 자원의 상황이(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풍요함이) 포함되어 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본다면 행복은 외적인 상황이 좋고 자원이 풍족한 삶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행복이라는 말을 쓸 때 그 의도는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기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와 언어 사용자의 구체적 의도는 상당히 다른 것 같다. 행복의 문자적 의미는 행복의 객관적 혹은 외적인 조건을(외적인 상황과 경제적 풍요를) 말하는 것이고 언어 사용자의 구체적 의도는 주관적 상태를(긍정적이며 보람을 느끼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행복이라는 말은 개념적으로 자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복의 개념을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의 조건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 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요즘 행복하시죠? 그렇죠?
이런 행복의 개념 여행을 다녀오면, 아주 자연스러웠던 물음인 “요즘 행복하세요?”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행복이 오가는 느낌에 좌우되는 그런 사회에 살아온 탓에 이 질문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선입견으로 가득 찬 질문이다. 먼저 이 질문은 행복에 요즘과 이전이라는 시간을 연결한다. 요즘 행복과 이전 행복을 구분해 질문하는 것은 행복에 관한 암묵적인 생각을 전제하는 것이다. 행복에 유효 기간이 있을까? 과거에는 불행했고 지금은 행복하다는 식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이 질문이 행복에는 시간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행복에 대한 오해를 조장한다. 행복의 개념 중에는 시간적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행복은 순간순간의 느낌이 아니라 일생 전체를 놓고 내리는 평가의 의미로 생각하는 행복 개념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 개념에는 “요즘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런 개념에 따르면 행복에는 ‘요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행복에는 ‘예전에는’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나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이유는 행복이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느낌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관한 것이라서 이들이 행복한지는 이들이 나이가 들어 인생을 다 살아보아야 말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야구는 9회 말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은 인생을 다 살아보아야 알 수 있다는 입장을 담고 있는 행복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행복 개념을 참 이상한 것이라 생각할 분들이 많겠지만 이런 행복 개념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행복의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행복을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행복 개념을 공부하면 행복에 관한 이런 숨겨진 전제들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행복은 돈이 아니다. 그럴까?
행복의 다양한 모습을 알게 해주는 행복의 개념 여행이 주는 또 한 가지 장점은 행복의 다양한 조건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의 물질적 조건에 관해 생각해보자. 흔히 행복은 돈이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행복은 돈이 아니라는 말은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A가 B의 충분조건(sufficient condition)이라는 것은 A 하나만으로 B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돈만으로 행복이 가능한 것은 아니므로(복권 당첨자의 삶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돈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돈이 행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돈과 행복의 애매한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행복의 여러 개념 중에는 돈이 행복에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을 함축하는 개념들이 있다. 즉 돈 그 자체로 행복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행복하기가 어렵다. A가 B의 필요조건(necessary condition)이라는 것은 A가 없을 때 B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민이 됨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조건 한 가지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돈과 행복의 관계도 설명될 수 있다. 돈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충분조건 : 돈 있음 → 행복함
필요조건 : 돈 없음 → 행복하지 못함
결국 돈은 행복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적 건강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 할 만하다. 행복 조건들의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가 다양한 행복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자세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행복의 개념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다. 편안하고 익숙한 환경을 떠나 다른 행복의 개념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행복의 세계는 너무도 다양하다. 행복의 개념 여행을 한번 떠나보기로 하자.
변방 노인의 말(塞翁之馬)
동양사상에는 인생에 관해 지혜가 담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변방 노인이 기르던 말 이야기다. 중국의 변방 작은 마을에 한 노인이 살았다. 어느 날 그 노인은 그가 아끼던 말이 한 마리 사라진 것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노인을 위로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리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며칠 후 놀랍게도 이 말은 다른 말을 데리고 노인이 사는 집에 나타났다. 집 나간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왔으니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노인은 그렇게 기쁘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얼마 후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나갔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노인은 지난 일과 마찬가지로 별 반응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마침 이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나 마을의 젊은이들이 군대로 징집을 당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이 노인의 아들은 마침 다리가 부러진 관계로 징집을 면하고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결국 말이 사라지고 돌아오고 아들이 다치고 징집을 면하고 하는 좋고 나쁜 일이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인생에 대한 깊은 관조가 이 이야기에는 깔려 있다.
이 이야기는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흔히 우리는 인생사는 새옹지마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말의 뜻은 이이야기에 나와 있듯이 인생살이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섞여 있어서 좋은 일이 있다고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고 나쁜 일이 있다고 특별히 슬퍼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축하와 위로에 대한 노인의 반응에서 이러한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이 이야기의 깊은 뜻을 인생살이의 시각에서 설명한다. 즉 인간의 길흉화복은 이야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외적인 조건과 운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쑥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변화에 대한 노인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좋은 일이 있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조금 나쁜 일이 있다고 슬퍼할 일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최고라는 겸손의 인생철학을 배울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담담한 숙명론, 조심스러운 관망론, 그리고 단정하지 않는 겸손이 깔려 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이 이야기에는 다소간 수동적 행복관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인의 태도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변방 노인이 변화무쌍한 운세를 경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완전히 휩쓸리지는 않는다.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담담하게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은 단순히 수동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노인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노인의 말(馬)은 예측할 수 없는 행운과 불운을 가지고 왔지만 변방 노인의 담담한 모습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배우고 또 익히는 적극적 행복
동양의 고전에는 매우 적극적인 인생관과 행복관이 피력된 것이 많다. 공자님의 말씀에는 놀랄 만할 정도의 적극성이 담겨 있다. 배우고 또 시간이 있을 때 그 배운 것을 익히고(溫故知新)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이상 자기성찰(一日三省)을 해 수양과 덕을 닦으라는 말씀은 그냥 앉아서 좋은 일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다. 공자님의 일생을 보면 공자님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논어의 한 구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공자님을 군사력이나 형벌이 아니라 덕(德,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격의 탁월함과 깊이)을 통한 천하의 평정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다 알면서도 끝까지 하려는 사람(是知其不可而爲之者)”이라고 칭한 것이 있다. 결코 이러한 내용을 보면 공자님의 인생관은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자님의 행복 철학은 진정 공부하고 노력하는 인생관이다.
『논어』의 첫 장 첫 구절이 “배우고 또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시작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독교의 구약이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과 너무 대조되는 이 구절은 바로 인생의 문제를 나의 노력의 진정성에서 시작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듬뿍 보인다. 그런데 그 진정성의 시작이 배우는 것에 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물론 지식의 습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잘 발전시키고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적극적인 자기 발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적 행복관을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유교 전통에서 나타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보면 모두 다른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 무인도에서 혼자 휴가를 무한정 즐기는 행복이 아니다. 형제부모와 잘 지내고 친구와 나누며 후학(혹은 후손)을 잘 지도하는 삶이 유교적 삶의 즐거움에는 반드시 등장한다. 결코 이기적 자기완성이 행복의 목표는 아니다. 또 공자님이 추천하는 자기 개발 과정을 보면 결코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옛 성인의 가르침을 익히고 음악과 시와 예술을 음미할 수 있는 자신을 기르는 것이 유교적 수양의 핵심이다. 이것은 유교가 서양의 자유 교양 교육(liberal arts education, 특정한 직업이나 기술이 아니라 전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 맥을 같이하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유교적 인생관은 적극적 삶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자신의 전인격의 완성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유교적 행복관은 적극적 자기 개발과 타인과 더불어 사는 인격 완성에서 나오는 성장감 혹은 성취감의 즐거움이다. 즉 세상적 성공이나 금전적 확정과는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의 인격이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번영 혹은 번성의 상태가 유교적 행복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성인과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잘 발전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유교적 행복감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적 전통에서는 그냥 앉아서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가 아니라 학이시습(學以時習)의 과정인 것이다. 새옹지마의 경우와 같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운(運, 외적인 조건)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장기적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온고지신의 성장 과정인 것이다. 물론 동양인의 사고에 새옹지마의 인생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새옹지마의 인생관을 수동적 행복관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새옹지마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을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겸손히 잘 관찰하고 이해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혜를 단순히 수동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새옹지마의 인생관이 적극적인 유교적 행복관과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행복의 개념 요소들
이러한 서로 대비가 되는 생각을 놓고 보면 동양사상이라고 해도 상당히 다른 행복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것을 놓고 대략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행복에는 매우 다른 종류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행복이라고 하는 한국어에는 대략 행(幸)이라고 하는 외적인 상황(운이 좋음, 즉 인간관계, 건강, 사업 또는 승진에서 외적인 흐름이 개인의 뜻과 잘 맞음)과 복(福)이라는 자원의 상황이(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풍요함이) 포함되어 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본다면 행복은 외적인 상황이 좋고 자원이 풍족한 삶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행복이라는 말을 쓸 때 그 의도는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기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와 언어 사용자의 구체적 의도는 상당히 다른 것 같다. 행복의 문자적 의미는 행복의 객관적 혹은 외적인 조건을(외적인 상황과 경제적 풍요를) 말하는 것이고 언어 사용자의 구체적 의도는 주관적 상태를(긍정적이며 보람을 느끼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행복이라는 말은 개념적으로 자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복의 개념을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