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받아들인다는 것
첸싱 한
작가

슬픔을 외면하면 애정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어…
해탈로 가는 길은 모든 감정과 경험을 품는다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나에게 슬픔은 익숙한 동반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 뼛속 깊이, 어쩌면 뼈보다 더 오래된 것처럼 사무치게 느껴졌다.
현재 우리 삶, 더 나아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슬픔을 외면하기보다, 그 안에서 일생일대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키사 고타미와 겨자씨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자.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은 부유한 가문과 결혼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시댁에서는 그녀가 아들을 낳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를 사람답게 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아들은 몇 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키사 고타미는 슬픔에 미쳐버리게 된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아들을 되살릴 수 있는 약을 구하던 중, 마침내 누군가가 그녀를 부처님께 인도한다. 부처님은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가져오면, 아이를 위한 약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키사 고타미는 다시 집집마다 다니며 겨자씨를 구한다. 모두가 흔한 향신료인 겨자씨를 흔쾌히 내주겠다고 하지만, 가족 중 누군가 죽은 적이 있냐는 물음에는 한결같이 물론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키사 고타미는 결국 겨자씨를 얻지 못한 채, 죽음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키사 고타미와 마찬가지로, 파타차라라는 여인도 참혹한 상실의 아픔을 잘 아는 인물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하인과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떨어져 소박한 시골 생활을 시작한다. 첫아이를 임신한 파타차라는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만, 처가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 때문에 미처 출산일에 맞춰 친정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파타차라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남편은 처음에는 반대하나, 결국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파타차라는 폭풍이 몰아치는 길 위에서 진통을 겪게 된다. 남편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독사에게 물리는 바람에 파타차라가 아이를 낳는 순간 세상을 떠난다.
깊은 슬픔에 빠진 파타차라는 친정으로 계속 향하지만, 폭우로 인해 강물이 불어난 것을 발견한다. 두 아이를 동시에 데리고 강을 건널 수 없었던 파타차라는 첫째를 강둑 가까이에 두고, 둘째를 안아 거센 물살을 헤치고 강 건너편에 내려놓는다. 첫째를 마저 데리러 돌아가려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나타나 둘째를 낚아채려 한다. 파타차라는 두 팔을 흔들며 새를 쫓으려 하지만 매는 둘째 아이를 물고 날아가버리고, 어머니의 몸짓을 건너오라는 신호로 오해한 첫째는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물살에 휩쓸려 익사해버리고 만다. 이 모든 비극을 겪은 파타차라는 홀로 부모님 댁에 도착하나, 전날 밤의 폭풍으로 번개가 내리쳐 집이 전소되고 부모님과 남동생이 모두 숨진 것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키사 고타미와 파타차라의 슬픔은, 싯다르타 왕자가 자신과 갓 태어난 아들 라훌라를 두고 떠났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야쇼다라가 느꼈을 슬픔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싯다르타와 야쇼다라는 16세에 결혼해, 싯다르타가 29세에 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한 사이였다. 야쇼다라의 남편은 죽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다른 종류의 상실 앞에서 그녀가 겪은 슬픔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아난다가 느꼈을 슬픔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빠진다. 아난다는 사촌이자 소꿉친구, 벗이자 스승을 한 번에 잃은 셈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눈물을 흘린 그는, 부처님의 가까운 제자 중 유일하게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였다.
키사 고타미와 파타차라, 야쇼다라와 아난다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파타차라의 고통이 키사 고타미의 고통보다 극심한지, 아난다의 슬픔이 야쇼다라의 슬픔보다 더 큰지를 비교하기보다, 그들의 경험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인간이 고래의 첫 소리를 해독할 수 있을까?’라는 4분짜리 동영상을 본 후에야 이들의 삶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슬픔을 이해하게 되었다. 영상에서는 12마리 가까이 되는 향유고래들이 이례적으로 한데 모인 푸른 바닷속에 새빨간 붉은색이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처음에 이것이 고래들이 공격당해 흘린 피라고 생각하나, 이내 조그마한 머리가 물 위로 올라오자 그들이 새끼 고래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끼 고래를 둘러싼 이 모임에는 곧 둥근머리 돌고래, 샛돌고래 등도 합류했고, 종들 간의 만남은 그렇게 하루 종일 이어졌다. 고래들의 언어를 해독하는 ‘세티(CETI; Cetacean Translation Initiative)’ 프로젝트의 설립자인 데이비드 그루버는 이 장면을 보고, “이들은 한때 살육자로 비난받은 동물이며, 이들의 뇌에서 얻은 기름으로 양초를 밝히기 위해 남획되었지만, 여기서는 포유류 역사상 가장 극진하고 애정 어린 보살핌의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위대한 포유류들은 일생일대의 특별한 순간을 기념할 줄 아는 것이다. 어쩌면 고래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생명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연약하고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 문화권들이 의식과 공동체를 통해 죽음을 기리듯, 이 고래들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탄생을 기린다.
우리는 평생 새끼 고래의 탄생을 목격하지도, 키사 고타미나 파타차라, 야쇼다라와 아난다처럼 출가해 깨달음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고래들, 그리고 이 스님들과 유대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슬픔과 애정이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슬픔을 외면하면 애정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탄생을 축하하고 상실을 애도하는 것만큼 우리의 사랑과 경외를 잘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까? 해탈로 가는 길은 모든 감정과 경험을 품으며, 우리의 뼛속에는 슬픔의 깊이만큼이나 무한한 강인함이 깃들어 있다.
• 이 글은 라이언스 로어(Lion’s Roar)에서 먼저 발표된 ‘When Grief is All Around: Listen, Learn, Love’라는 원고를 재구성해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조연우
첸싱 한(Chenxing Han)|스탠퍼드 대학교를 나와 연합신학대학원(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불교학 석사를 받았으며, 캘리포니아 버클리 불교학연구소에서 불교 교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미국의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및 불교 공동체에서 작가이자 연사 및 워크숍 리더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Raising the Voices of Asian American Buddhists』와 『one long listening: a memoir of grief, friendship, and spiritual care』가 있다.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것
첸싱 한
작가
슬픔을 외면하면 애정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어…
해탈로 가는 길은 모든 감정과 경험을 품는다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나에게 슬픔은 익숙한 동반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언어와 문화, 그리고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 뼛속 깊이, 어쩌면 뼈보다 더 오래된 것처럼 사무치게 느껴졌다.
현재 우리 삶, 더 나아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슬픔을 외면하기보다, 그 안에서 일생일대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키사 고타미와 겨자씨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자.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은 부유한 가문과 결혼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시댁에서는 그녀가 아들을 낳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를 사람답게 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아들은 몇 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키사 고타미는 슬픔에 미쳐버리게 된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아들을 되살릴 수 있는 약을 구하던 중, 마침내 누군가가 그녀를 부처님께 인도한다. 부처님은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가져오면, 아이를 위한 약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키사 고타미는 다시 집집마다 다니며 겨자씨를 구한다. 모두가 흔한 향신료인 겨자씨를 흔쾌히 내주겠다고 하지만, 가족 중 누군가 죽은 적이 있냐는 물음에는 한결같이 물론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키사 고타미는 결국 겨자씨를 얻지 못한 채, 죽음이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키사 고타미와 마찬가지로, 파타차라라는 여인도 참혹한 상실의 아픔을 잘 아는 인물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하인과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떨어져 소박한 시골 생활을 시작한다. 첫아이를 임신한 파타차라는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만, 처가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 때문에 미처 출산일에 맞춰 친정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파타차라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남편은 처음에는 반대하나, 결국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파타차라는 폭풍이 몰아치는 길 위에서 진통을 겪게 된다. 남편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독사에게 물리는 바람에 파타차라가 아이를 낳는 순간 세상을 떠난다.
깊은 슬픔에 빠진 파타차라는 친정으로 계속 향하지만, 폭우로 인해 강물이 불어난 것을 발견한다. 두 아이를 동시에 데리고 강을 건널 수 없었던 파타차라는 첫째를 강둑 가까이에 두고, 둘째를 안아 거센 물살을 헤치고 강 건너편에 내려놓는다. 첫째를 마저 데리러 돌아가려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나타나 둘째를 낚아채려 한다. 파타차라는 두 팔을 흔들며 새를 쫓으려 하지만 매는 둘째 아이를 물고 날아가버리고, 어머니의 몸짓을 건너오라는 신호로 오해한 첫째는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물살에 휩쓸려 익사해버리고 만다. 이 모든 비극을 겪은 파타차라는 홀로 부모님 댁에 도착하나, 전날 밤의 폭풍으로 번개가 내리쳐 집이 전소되고 부모님과 남동생이 모두 숨진 것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키사 고타미와 파타차라의 슬픔은, 싯다르타 왕자가 자신과 갓 태어난 아들 라훌라를 두고 떠났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야쇼다라가 느꼈을 슬픔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싯다르타와 야쇼다라는 16세에 결혼해, 싯다르타가 29세에 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한 사이였다. 야쇼다라의 남편은 죽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다른 종류의 상실 앞에서 그녀가 겪은 슬픔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아난다가 느꼈을 슬픔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빠진다. 아난다는 사촌이자 소꿉친구, 벗이자 스승을 한 번에 잃은 셈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눈물을 흘린 그는, 부처님의 가까운 제자 중 유일하게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였다.
키사 고타미와 파타차라, 야쇼다라와 아난다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파타차라의 고통이 키사 고타미의 고통보다 극심한지, 아난다의 슬픔이 야쇼다라의 슬픔보다 더 큰지를 비교하기보다, 그들의 경험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인간이 고래의 첫 소리를 해독할 수 있을까?’라는 4분짜리 동영상을 본 후에야 이들의 삶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슬픔을 이해하게 되었다. 영상에서는 12마리 가까이 되는 향유고래들이 이례적으로 한데 모인 푸른 바닷속에 새빨간 붉은색이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처음에 이것이 고래들이 공격당해 흘린 피라고 생각하나, 이내 조그마한 머리가 물 위로 올라오자 그들이 새끼 고래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끼 고래를 둘러싼 이 모임에는 곧 둥근머리 돌고래, 샛돌고래 등도 합류했고, 종들 간의 만남은 그렇게 하루 종일 이어졌다. 고래들의 언어를 해독하는 ‘세티(CETI; Cetacean Translation Initiative)’ 프로젝트의 설립자인 데이비드 그루버는 이 장면을 보고, “이들은 한때 살육자로 비난받은 동물이며, 이들의 뇌에서 얻은 기름으로 양초를 밝히기 위해 남획되었지만, 여기서는 포유류 역사상 가장 극진하고 애정 어린 보살핌의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위대한 포유류들은 일생일대의 특별한 순간을 기념할 줄 아는 것이다. 어쩌면 고래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생명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연약하고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 문화권들이 의식과 공동체를 통해 죽음을 기리듯, 이 고래들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탄생을 기린다.
우리는 평생 새끼 고래의 탄생을 목격하지도, 키사 고타미나 파타차라, 야쇼다라와 아난다처럼 출가해 깨달음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고래들, 그리고 이 스님들과 유대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슬픔과 애정이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슬픔을 외면하면 애정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탄생을 축하하고 상실을 애도하는 것만큼 우리의 사랑과 경외를 잘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까? 해탈로 가는 길은 모든 감정과 경험을 품으며, 우리의 뼛속에는 슬픔의 깊이만큼이나 무한한 강인함이 깃들어 있다.
• 이 글은 라이언스 로어(Lion’s Roar)에서 먼저 발표된 ‘When Grief is All Around: Listen, Learn, Love’라는 원고를 재구성해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조연우
첸싱 한(Chenxing Han)|스탠퍼드 대학교를 나와 연합신학대학원(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불교학 석사를 받았으며, 캘리포니아 버클리 불교학연구소에서 불교 교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미국의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및 불교 공동체에서 작가이자 연사 및 워크숍 리더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Raising the Voices of Asian American Buddhists』와 『one long listening: a memoir of grief, friendship, and spiritual car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