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은 잘사는 삶인가?|행복 : 마음의 지혜와 과학

행복한 삶은 잘사는 삶인가?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 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은 결국은 잘사는 것의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에는 잘사는 것과 행복의 관계에 관한 생각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잘사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한 삶은 잘사는 삶인가? 1997년 빌리 하렐 주니어는 3,000만 달러(약 30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다. 그는 어려운 삶이 끝나고 즐거운 인생이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잡화상의 점원이었던 그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고 가족과 하와이로 여행을 다니고 친지들에게 집을 사주고 그가 다니는 교회와 비영리단체에 돈을 기증했다. 그는 정말 멋진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인생은 더 어렵게 되었다. 그는 복권 당첨금을 일시불로 받도록 해주는 회사와 거래하면서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되고 그의 돈을 노리는 사람들의 협박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지내는 과정에서 그는 그의 부인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권총으로 머리를 겨눠 자살하게 된다. 그가 죽기 전 그는 그의 재산 관리인에게 복권에 당첨된 것은 그에게 일어난 최악의 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은 행복이 복권 당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권에 당첨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고 복이다. 사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따진다면 행복은 행(운)과 복(재력)의 합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과연 행운이나 복인가? 매년 새해가 돌아올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이 사람은 행운과 복을 위해 사는가?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v Tolstoy)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에서 인간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마음이 약해서 쫓겨난 천사 미하일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마 톨스토이의 삶과 그의 철학을 잘 이해하시는 분들은 이 질문의 답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는 여인을 보고 천사 미하일은 그 답이 “사랑”(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이타적 감정)임을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외적인 고통과 어려운 문제들을 겪고 있지만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의 희망과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미하일을 통해 다른 두 가지 질문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한 가지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부족한 것,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자신이 죽을 것을 모르고 오래 신을 수 있는 구두를 주문하는 부자의 상황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가? 과연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복권 당첨과 같은 외적이며 물질적 행운인가? 우리는 혹 필요 없는 구두를 주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톨스토이는 또 다른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계속적으로 삶의 근본적 문제를 논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흠은 하루 종일 걸어서 간 만큼의 무제한의 땅을 정해진 가격에 판다는 소식을 듣고 더 넓은 땅을 사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걸어간다. 아마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엄청난 넓이의 땅을 싼값에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이 욕심 때문에 바흠은 먼 곳으로 내달렸고 땅을 파는 사람과 약속된 시간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무리하다가 넓은 땅을 차지하기 직전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그는 광활한 땅을 얻을 찰나에 숨을 거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을 겨우 가눌 정도의 땅에 묻히고 말았다. 정말 얼마만큼의 땅이 바흠에게 필요했을까? 바흠이 땅을 필요로 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바흠이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그토록 넒은 땅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치 몇 년을 신을 수 있는 구두를 주문한 부자와 같이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모르고 바흠과 같은 착각과 무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반면 행복은 땅이나 복권 당첨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마음에 있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은 마티외 리카르(Matthieu Ricard)의 사례를 살펴보자. 리카르는 프랑스 출신의 생물학자였지만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된 분이다. 그는 리처드 데이비슨 교수가 이끄는 위스콘신대학 명상 연구에 피실험자로 참가한다. 이 연구는 명상이 두뇌와 마음에 주는 영향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연구에서 리카르는 그의 명상을 통해 놀라운 뇌파를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은 이 연구의 피실험자 누구에게도 발견된 적이 없는 매우 다른 형태의 뇌파였다. 그의 뇌파는 고도의 의식 상태의 극단에서 나타나는 감마파(gamma wave, 보통의 뇌파보다 높은 25Hz~100Hz 영역의 상위 주파수를 띠는 두뇌 파장)였다. 인간의 두뇌에서 감마파가 실제로 측정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리카드의 명상은 이러한 감마파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좌측전전두엽의 강한 활동 또한 보여주었다. 좌측전전두엽은 두뇌 활동의 집중과 통제를 담당한다고 알려진 부분이다. 즉 리카르의 뇌는 강한 의식의 집중(감마파의 출현)과 그 흔들리지 않는 지속(전전두엽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아마도 정신의 깊은 열락 상태 혹은 내적 의식의 통일 상태가 아닌가 한다. 이 때문에 그는 대중매체에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물론 리카르는 이런 칭호를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연구는 그의 뇌파와 두뇌 반응이 명상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의식의 집중이 보여주는 정신적 행복이 있다는 점을 리카르의 명상은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 명상의 행복은 복권 당첨이나 광대한 토지 소유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행복도 이 글에서 찬찬히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상이 자기몰입(self-absorption) 혹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아도취, 자기 환상과 자기 세계에 완전히 갇혀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론(Conquest of Happiness)』의 저자로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은 자기몰입 현상을 행복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한다. 사는 것은 개방성이다. 타인과 외부 세계와 교감하고 느끼고 성장하는 것이다.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은 이러한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생명성을 잃는 것이다.


국가 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행복은 개인적 삶에 관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행복추구권은 이제 보편적인 인권의 한 부분이 된 지 오래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존과 안전뿐만 아니라 행복 추구 또한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강하고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는 이제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의 경제적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인간의 욕망의 효과적인 만족을 그것도 물질적인 만족을 가능하도록 하는 체계로 고안되었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적으로 해석된 만족과 복지는 과연 진정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가? 히말라야산맥을 끼고 있는 소국인 부탄(Bhutan)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이다. 부탄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대한민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의 약 10 분의 1 정도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하나라고 한다. 부탄은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이라는 경제 지표 대신 국가 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GHP)라는 지표를 도입해 국민의 행복에 관심을 가졌으며 2006년에는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물론 행복지수가 반드시 행복의 정확한 측정 방법은 아니다. 행복 상위 국가로 알려진 북유럽의 복지 국가들은 실제로 우울증 치료제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과 다른 국가 총행복지수가 있다는 점은 행복이 단순한 경제적 성장과 소득의 절대적 상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 총생산이 아니라 국가 총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와 양립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장과 삶의 질을 조화시켜 개개인의  행복 추구를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가? 많은 분들은 행복의 정치학에 관심이 없다. 행복은 오로지 개인적 삶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행복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환경적이기도 하다. 행복을 논할 때 바로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리하여 이 글에서는 행복에 관한 복합적 조망이 생긴다. 행복에 관한 개념적 정의, 주관적 마음, 객관적 조건, 물질적 풍요와 안락, 명상적 행복, 사회적 환경, 행복에 대한 반대 의견 등등이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 논의될 것이다. 이 복잡한 행복 논의의 여정은 행복하려는 맹목적 욕구가 아니라 행복을 생각해보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천사 미하일이 깨달았듯이 사람들은 스스로 진정 필요로 하는 것 혹은 원하는 것을 잘 모른다. 필요도 하지 않는 튼튼한 구두를 주문하는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행복의 조건을 찾는 것보다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맹목적으로 행복한 것보다는 행복을 잘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검토하지 않은 삶은 살 필요가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이 글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썼다. 이 논의의 여정 자체가 행복한 길이 되기를 바란다. 꿈은 꾸는 자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은 집착하지 않으면서 의미 있게 검토하고 추구하는 자의 것이다.


칸트와 파리의 경찰서장

행복은 인생의 최대 목표라고 많은 이들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행복만큼이나 우리에게 착각이나 오해를 많이 일으키는 것도 없다. 많은 분들이 행복에 대해 달콤하고, 따끈하고, 즐거운 것을 생각하지만 실상 행복에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모두 행복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행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많다. 지혜로운 성인들 중에는 진정한 삶이 행복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믿는 분들도 있고 올바른 삶은 행복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또 인생의 최종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올바름’이나 ‘깨달음’이라는 주장을 펴는 철학자들도 있다. 물론 행복이 중요한 가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행복이 인간에게 너무도 당연한 가치라고 손쉽게 생각하는 것은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에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최고의 선은 행복(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이 모두 충족되어 즐거운 상태)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의 원리를 달성하려는 순수 도덕의지에 있다고 보았고 이런 도덕의지는 행복 성취와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행복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나 인간의 최고선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반대되며 행복에 관한 많은 이들의 상식과도 매우 다른 주장이다. 하지만 칸트의 주장은 행복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행복이라는 가치를 당연시하는 태도에 경종을 울리면서 행복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자세히 검토해볼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과연 행복은 인생 최고의 목표인가?

행복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중 하나는 행복감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행복은 행복감(벅차고 즐거운 감정)을 통해 느껴지기도 하지만 행복이 반드시 행복감인 것은 아니다. 사랑이 사랑의 감정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사랑이 사랑의 감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배려, 관심, 그리고 희생 같은 것을 포함하는데 이들 중에는 마음 설레는 감정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이 많다. 마찬가지로 행복을 삶의 총체적인 의미나 가치로 생각하면 행복을 감정과 반드시 연결 지을 필요는 없게 된다. 행복이 즐거운 느낌만은 아니기 때문에 행복한 삶과 행복한 감정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필가인 알랭(필명 : Alain, 본명 : 에밀-오귀스트샤르티에, Emile-AugusteChartier, 1868~1951)은 그의 행복론에서 파리의 경찰서장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언제나 책상 위에는 사건 사고 보고서가 가득하고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 여유 있고 즐거운 행복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파리의 경찰서장이다. 알랭이 말하는 행복은 느낌의 행복이 아니라 사는 것에 관한 행복이다. 느낌은 순간순간의 감각이지만 사는 것은 길게 의미를 만들어가야 하는 활동이다. 행복하기 위해 모두가 파리의 경찰서장이 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을 즐거운 느낌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다.


행복이라는 말

여기에 덧붙여 행복을 이해하는데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행복’이라는 말이 ‘물’이나 ‘어머니’와 같이 어느 언어나 문화권에서도 통하는 보편적 개념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행복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언어나 문화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어원만을 따진다면 한국어의 ‘행복’은 ‘행(幸)’과 ‘복(福)’이 연합된 말이다. 행은 대략적으로 계획한 일이 막힘없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복은 자원이 풍부함을 말한다.(참고로 중국어와 일본어도 행복[幸福]이라는 한자어를 써서 행복을 표현한다.) 즉 행과 복은 계획된 일이 예측한 대로 잘 이루어지고 자원이(경제적 자원과 인적 자원이) 풍부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사는 것이 예측하지 못한 외적인 방해나 부족함 없이 잘 풀려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런 행복의 어원적 의미는 영어,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에서 쓰이는 행복의 단어 의미와 중첩되는 것이 많다. 영어의 해피니스(happiness)는 햅(hap)이라는 말에서 기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햅(hap)은 해픈(happen, 일어남), 햅해자드(haphazard, 우연함, 임의적, 불규칙, 무질서), 그리고 해픈스탠스(happenstance, 우연)라는 영어 단어에 나타나는 말로 서운(運, luck)이나 기회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행복에 해당되는 독일어 글뤽(Glück, 운), 그리고 프랑스어  보뇌(Heur 또는 Bonheur, 운)와도 연결되는 말이다. 한국어에서 서운(運)이란 펼쳐짐 혹은 굴러감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행운, 운세, 그리고 운명이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즉 한국어를 비롯해 여러 나라 말에서 행복이라는 단어에는 사는 것이 계획대로 잘 풀려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행복은 배가 순풍을 받아 잘 나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말의 쓰임이나 행복 개념은 문화나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예(禮) 또는 예의(禮儀)라는 한국말은 영어에도 매너, 리추얼, 에티켓, 포멀리티(manner, etiquette, ritual, formality) 같은 말이 있지만 그 개념은 매우 다르다. 한국어의 예는 유교적 전통에 깊이 영향을 받은 배경 때문에 규범적인 의미와 인격의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지만 영어나 서구 언어에서의 예의 혹은 예절은 사회적 의미나 행위적 의미가 윤리적인 의미보다 더 강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무엇이 예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표현이 단지 격식에 맞지 않다는 뜻과 더불어 규범적 혹은 윤리적으로 합당하지 못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예의는 또한 단순한 행동 패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의 바른 행동뿐만 아니라 예의 바른 사람도 있고 예의 없는 사람은 단순히 세련되지 못한 사람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예라는 말을 다른 나라 말로 정확히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마찬가지 이유로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느 나라 말에도 있기는 하지만 그 정확한내용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삶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les, 기원전 384~322)의 『행복에 관한 철학적 성찰』에서는 행복이 ‘유다이모니아(euidaimonia)’라는 말로 쓰이는데 유다이모니아는 한국어의 ‘행복’ 그리고 영어의 ‘해피니스(happiness)’라는 말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닌 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유다이모니아는 유(eu, 좋음)와 다이몬(daimon, 영혼 혹은 심성)의 합성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다이모니아를 설명하면서 ‘잘 사는 인생’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번역서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다이모니아가 행복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다이모니아는 번성하는 혹은 번창하는(flourishing) 영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즉 유다이모니아는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화적 특수성 또는 철학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행복 그리고 미국인이 생각하는 해피니스(happiness)가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한 유다이모니아와 다르다면 행복이라는 것이 보편적(혹은 문화중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든지 한 가지 의미의 행복을 누구나 추구한다고 혹은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래서 여러 다른 종류의 행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행복에 관한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내 몸에 맞는 옷을 찾듯이 내 삶에 맞는 행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행복에 관한 편견이나 오해도 버려야 할 것이다. 행복은 그냥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식으로 의미 있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정한 방식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일정한 방식에는 여러 길이 있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화된 선택지가 존재한다. 그래서 행복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 여행을 떠나야 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그저 즐거운 행복이 아니라 색다르고 형태도 다른 행복의 모습들을 다른 나라를 여행하듯이 돌아다니며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이 여행에서 나에게 맞지 않는 행복관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에 관해 올바른 현실감을 갖기 위해서는 행복에 관한 여러 가지 개념들과 관점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고 나면 내가 원하는 것이 혹은 적어도 내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여행을 다녀오면 아마 행복의 길은 이미 반은 걸어온 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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