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으로 가는 마음공부
- 양심에서 무심 또는 허심까지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우리가 사람을 믿는 까닭
벌써 1년 6회 연재의 마지막이다. 어떤 마음을 잡을까 살피다 진작에 잡아야 할 마음은 달아나버린 것이 아닌지 속상하다.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 이렇다. 해야 할 것은 안 하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세월만 보낸다. 말로는 ‘그것이 방법론이다, 논리학이다, 인식론이다’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로 잡으려는 바로 그놈이 아닐 수 없다.
철학을 하면서 자랑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철학은 자기를 부정한다. ‘왜 철학 하냐’고 늘 묻는다. ‘그딴 것이 철학이냐’고 떠날 줄도 안다. 다른 학문은 자기 학문이 제일이라는데, 철학만큼은 유일하게 자기 학문을 회의한다. 그래서 책과 글을 태워버린 철학자가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는 책 제목이 『태워버릴 책』(분서焚書)이거나 마지막에 ‘입 다물라’로 끝낸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철학과 불교가 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경전을 버릴 줄 알고, 당장(當場)의 자비심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그마를 버리자는 것으로, 종교(宗敎)의 교설(敎說)을 부수고 그 종지(宗旨)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식은 말한다. ‘마음을 찾으라’고, ‘마음공부 하라’고. 사람들은 주고받는다. ‘마음을 비우라’고.
사실, ‘마음 찾기’와 ‘마음 비우기’는 상반하는 명제다. 하나는 ‘뭔가 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뭔가 없애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모두를 ‘공부하라’고 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런 학리적인 글로 여러분이 찾고자 하거나 비우고자 하는 마음을 늘어놓아 보았다.
우리말에서 마음의 용법이 다양한 것처럼 한자어나 서양어에서도 그 용례가 복잡다단하다. 그래서 나눠놓고, 줄여놓고, 한둘을 잡아보라는 것이 이 글의 의도였다.
유가의 마음이 좋은 것 같지만 아니다. 유가는 심(心)과 성(性)을 나누어 말하면서 심은 나쁠 수 있지만 성은 좋은 것으로 이야기를 몰고 나갔다. 순자는 성조차 나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유가 집단에서 이단으로 몰렸지만, 맹자조차 성이 아닌 심은 자꾸만 달아나는 것(방심放心)이다. 유가는 성의 개념을 등장시켜 심을 뒷전으로 몰아놓았다.
도가의 심이 좋을 듯하지만 그 심은 쉽게 야망에 쏠리거나 편견에 치우친다. 노자가 ‘마음이 기를 움직이면 세진다’(『노자』, 제55장: 心使氣曰强)고 하는 것은 부드러움에 상반된 부정적인 것이며, 장자가 말하는 ‘마음 가다듬기’(심재心齋: 『장자』, 「인간세」)의 구체적인 수행 방법도 ‘비우기’(허虛)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송대의 장자 주석자 임희일(林希逸)이 장자의 성심(成心: 「제물론」)을 좋게 해석한 이래 많은 학자가 그를 따랐지만 문맥상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 그렇게 마음을 좋게 보려 할까? 노자도 사람을 믿는다는 점에서 사람의 근원적 성향을 긍정하고, 맹자도 누구에게나 남을 도와주려는 감정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태생적 도덕성을 인정하는데, 왜 그럴까?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사람을 믿으려 할까? 왜 우리는 사람을 좋게 보려 할까? 왜 우리는 사람이 환경 탓만 아니라면, 잠시 울분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착한 부모 만났다면, 먹고살 만했다면, 마음을 곱게 썼으리라 생각할까?
서양의 성악설과 동양의 성선설
크지만 쉽게 말해보자. 조물주가 있고 사람이 있다고 하자.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어놓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서양의 계몽주의자다. 이른바 이신론(理神論; deism)으로 불리는 무간섭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명의 건설은 사람의 몫이다. 잘되든, 못 되든 사람의 일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신 없이도 도덕 사회를 건설한 공자’에 반했고, 그와 다투었던 루소는 ‘사람은 내버려둬야 잘 산다고 생각하는 노자’와 같은 길을 간다.
‘사람을 내버려두어도 잘 산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신이 할 일이 없어진다. 잘못해야 신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구의 유대기독교적 사회는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반한다. 원죄설이 바로 그것이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데도 사람은 태어나면서 곧 죄인이란다. 그리하여 죄를 씻으라고 거듭 외친다.
그런데 동양은 순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람은 본디 깨끗하게 태어났는데 살다 보니 때가 묻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장은 ‘영아’(嬰兒: 『노자』, 제10, 20, 28장)의 ‘순수’(純粹: 『장자』, 「각의」)를 강조하고, 맹자는 누구나 지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맹자』, 「공손추」상, 「고자」상)을 부각한다.
게다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심(佛心)설은 ‘모두가 부처다’라는 선언으로 마음의 절대화를 이뤄낸다. 원효의 말처럼 중생심이 곧 법이 되면서 대중의 존엄과 가치가 신성을 띠게 된다. 마음을 마주하면 곧 부처를 마주한다(즉심즉불卽心卽佛). 아울러 불교의 유식학은 ‘마음이 다다’라는 체계 아래 마음을 말하면서 딴소리를 할 수 없게 확실하게 못 박는다.
그런 점에서 동양은 성선설에 기초한다. 노장이 무엇인지도 모를 우리의 본성을 철저히 수용했듯이, 주자의 성즉리(性卽理)가 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로 확대해나가듯, 선불교에서 불성(佛性)을 지닌 우리가 마침내 불심(佛心)을 찾아 성불(成佛)하듯, 이제 마음은 모든 것의 바탕으로 깔리게 되는 것이다.
마음: 심, 성, 정, 그리고 정신
이렇게 나누어 보면 마음공부하기에 편할 듯하다.
◎ 나쁜 마음
욕심 : 일상의 마음으로, 애욕에 눈이 먼다. 돈 욕심, 이름 욕심이다.
편견 : 장자의 성심(成心)과 같은 선입관이다. 인종주의, 차별주의의 근원이다.
◎ 좋은 마음
공감 : 맹자의 측은지심과 같이 남에게 느끼는 동정심이다. 남의 아픔, 배고픔, 슬픔을 나의 안타까움으로 느낀다. 맹자는 이를 ‘마음 갖추기’(존심存心)로 표현하기도 한다.
양심 : 남과 상관없이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감정으로 이를테면 양심의 가책이다. 맹자는 양심(良心)만이 아니라, 양지(良知)와 양능(良能)도 말한다.
◎ 빈 마음
무심(無心) : 『장자』에도 나온다. 무심하게 뭔가 억지로 꾀하지 않는다.
허심(虛心) : 원전에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으로 쓰지만, 결과적으로는 빔이 이루어진 상태다. 허극(虛極)이라고도 한다. 무아(無我) 또는 공(空)의 상태다.
<심우도(尋牛圖)>의 소 찾기처럼 가-나-다의 순서를 생각하면서, 정신(精神)을 차리고 마음을 찾자. 아이의 마음으로 천지의 정신과 함께 놀자. 처음은 신명 나게(순자), 마침내는 느긋하게(노자)!
덧붙여 우리처럼 ‘정(情)이 많다’는 표현이 널리 좋게 쓰이는 문화는 드물다. 마음을 쓰는 것이 곧 핏줄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공부란 나에게는 마음 비우기이고, 남에게는 마음 베풀기다.
• 이번 호를 끝으로 정세근의 <동양의 마음> 연재를 마칩니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
빈 마음으로 가는 마음공부
- 양심에서 무심 또는 허심까지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우리가 사람을 믿는 까닭
벌써 1년 6회 연재의 마지막이다. 어떤 마음을 잡을까 살피다 진작에 잡아야 할 마음은 달아나버린 것이 아닌지 속상하다.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 이렇다. 해야 할 것은 안 하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세월만 보낸다. 말로는 ‘그것이 방법론이다, 논리학이다, 인식론이다’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로 잡으려는 바로 그놈이 아닐 수 없다.
철학을 하면서 자랑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철학은 자기를 부정한다. ‘왜 철학 하냐’고 늘 묻는다. ‘그딴 것이 철학이냐’고 떠날 줄도 안다. 다른 학문은 자기 학문이 제일이라는데, 철학만큼은 유일하게 자기 학문을 회의한다. 그래서 책과 글을 태워버린 철학자가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는 책 제목이 『태워버릴 책』(분서焚書)이거나 마지막에 ‘입 다물라’로 끝낸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철학과 불교가 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경전을 버릴 줄 알고, 당장(當場)의 자비심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그마를 버리자는 것으로, 종교(宗敎)의 교설(敎說)을 부수고 그 종지(宗旨)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식은 말한다. ‘마음을 찾으라’고, ‘마음공부 하라’고. 사람들은 주고받는다. ‘마음을 비우라’고.
사실, ‘마음 찾기’와 ‘마음 비우기’는 상반하는 명제다. 하나는 ‘뭔가 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뭔가 없애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모두를 ‘공부하라’고 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런 학리적인 글로 여러분이 찾고자 하거나 비우고자 하는 마음을 늘어놓아 보았다.
우리말에서 마음의 용법이 다양한 것처럼 한자어나 서양어에서도 그 용례가 복잡다단하다. 그래서 나눠놓고, 줄여놓고, 한둘을 잡아보라는 것이 이 글의 의도였다.
유가의 마음이 좋은 것 같지만 아니다. 유가는 심(心)과 성(性)을 나누어 말하면서 심은 나쁠 수 있지만 성은 좋은 것으로 이야기를 몰고 나갔다. 순자는 성조차 나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유가 집단에서 이단으로 몰렸지만, 맹자조차 성이 아닌 심은 자꾸만 달아나는 것(방심放心)이다. 유가는 성의 개념을 등장시켜 심을 뒷전으로 몰아놓았다.
도가의 심이 좋을 듯하지만 그 심은 쉽게 야망에 쏠리거나 편견에 치우친다. 노자가 ‘마음이 기를 움직이면 세진다’(『노자』, 제55장: 心使氣曰强)고 하는 것은 부드러움에 상반된 부정적인 것이며, 장자가 말하는 ‘마음 가다듬기’(심재心齋: 『장자』, 「인간세」)의 구체적인 수행 방법도 ‘비우기’(허虛)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송대의 장자 주석자 임희일(林希逸)이 장자의 성심(成心: 「제물론」)을 좋게 해석한 이래 많은 학자가 그를 따랐지만 문맥상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 그렇게 마음을 좋게 보려 할까? 노자도 사람을 믿는다는 점에서 사람의 근원적 성향을 긍정하고, 맹자도 누구에게나 남을 도와주려는 감정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태생적 도덕성을 인정하는데, 왜 그럴까?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사람을 믿으려 할까? 왜 우리는 사람을 좋게 보려 할까? 왜 우리는 사람이 환경 탓만 아니라면, 잠시 울분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착한 부모 만났다면, 먹고살 만했다면, 마음을 곱게 썼으리라 생각할까?
서양의 성악설과 동양의 성선설
크지만 쉽게 말해보자. 조물주가 있고 사람이 있다고 하자.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어놓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서양의 계몽주의자다. 이른바 이신론(理神論; deism)으로 불리는 무간섭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명의 건설은 사람의 몫이다. 잘되든, 못 되든 사람의 일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신 없이도 도덕 사회를 건설한 공자’에 반했고, 그와 다투었던 루소는 ‘사람은 내버려둬야 잘 산다고 생각하는 노자’와 같은 길을 간다.
‘사람을 내버려두어도 잘 산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신이 할 일이 없어진다. 잘못해야 신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구의 유대기독교적 사회는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반한다. 원죄설이 바로 그것이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데도 사람은 태어나면서 곧 죄인이란다. 그리하여 죄를 씻으라고 거듭 외친다.
그런데 동양은 순자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람은 본디 깨끗하게 태어났는데 살다 보니 때가 묻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장은 ‘영아’(嬰兒: 『노자』, 제10, 20, 28장)의 ‘순수’(純粹: 『장자』, 「각의」)를 강조하고, 맹자는 누구나 지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맹자』, 「공손추」상, 「고자」상)을 부각한다.
게다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심(佛心)설은 ‘모두가 부처다’라는 선언으로 마음의 절대화를 이뤄낸다. 원효의 말처럼 중생심이 곧 법이 되면서 대중의 존엄과 가치가 신성을 띠게 된다. 마음을 마주하면 곧 부처를 마주한다(즉심즉불卽心卽佛). 아울러 불교의 유식학은 ‘마음이 다다’라는 체계 아래 마음을 말하면서 딴소리를 할 수 없게 확실하게 못 박는다.
그런 점에서 동양은 성선설에 기초한다. 노장이 무엇인지도 모를 우리의 본성을 철저히 수용했듯이, 주자의 성즉리(性卽理)가 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로 확대해나가듯, 선불교에서 불성(佛性)을 지닌 우리가 마침내 불심(佛心)을 찾아 성불(成佛)하듯, 이제 마음은 모든 것의 바탕으로 깔리게 되는 것이다.
마음: 심, 성, 정, 그리고 정신
이렇게 나누어 보면 마음공부하기에 편할 듯하다.
◎ 나쁜 마음
욕심 : 일상의 마음으로, 애욕에 눈이 먼다. 돈 욕심, 이름 욕심이다.
편견 : 장자의 성심(成心)과 같은 선입관이다. 인종주의, 차별주의의 근원이다.
◎ 좋은 마음
공감 : 맹자의 측은지심과 같이 남에게 느끼는 동정심이다. 남의 아픔, 배고픔, 슬픔을 나의 안타까움으로 느낀다. 맹자는 이를 ‘마음 갖추기’(존심存心)로 표현하기도 한다.
양심 : 남과 상관없이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감정으로 이를테면 양심의 가책이다. 맹자는 양심(良心)만이 아니라, 양지(良知)와 양능(良能)도 말한다.
◎ 빈 마음
무심(無心) : 『장자』에도 나온다. 무심하게 뭔가 억지로 꾀하지 않는다.
허심(虛心) : 원전에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으로 쓰지만, 결과적으로는 빔이 이루어진 상태다. 허극(虛極)이라고도 한다. 무아(無我) 또는 공(空)의 상태다.
<심우도(尋牛圖)>의 소 찾기처럼 가-나-다의 순서를 생각하면서, 정신(精神)을 차리고 마음을 찾자. 아이의 마음으로 천지의 정신과 함께 놀자. 처음은 신명 나게(순자), 마침내는 느긋하게(노자)!
덧붙여 우리처럼 ‘정(情)이 많다’는 표현이 널리 좋게 쓰이는 문화는 드물다. 마음을 쓰는 것이 곧 핏줄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공부란 나에게는 마음 비우기이고, 남에게는 마음 베풀기다.
• 이번 호를 끝으로 정세근의 <동양의 마음> 연재를 마칩니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