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패션, 되살림 흐름으로|작은 것이 아름답다

비건 패션,


되살림 흐름으로

변택주
경영은 살림 연구가



요즘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옷이나 몸에 걸치고 바르기는 물론 탈것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비거니즘’ 바람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밀라노, 파리, 뉴욕에서 열리는 화려한 패션 주간에는 짐승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시위가 늘 따랐습니다. 그런데 2019년 2월, 로스앤젤레스 자연 사 박물관에서 ‘비건 패션 주간’이 펼쳐졌습니다. 짐승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고, 기후 위기에 맞닥뜨린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면서 패션계에도 ‘비건’이 성큼 다가선 것입니다. 세계 4대 패션 위크 가운데 하나인 런던 패션 위크에서는 모피를 밀어냈습니다. 세계동물보호단체 PETA 프랑스 지부는 ‘비건 패션 프라이즈’에서 비건 패션에 이름을 올린 브랜드들을 ‘패션 모멘트’로 뽑아 힘을 보탰습니다.

산목숨 빼앗지 않는다
패션 잡지 『보그』에 명품 패션 브랜드 구찌는 “구찌를 입은 사람들은 가식에 둘러싸여, 패션이 우아해야 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혹평이 실리고, 매출 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뒤따랐습니다. 급기야 이듬해 대표가 바뀌었습니다. 매출이 떨어질 때 살림살이를 맡은 마르코 비자리는 “봄 제품부터 모피를 빼겠다”고 외치고 나섭니다. 산짐승 가죽을 벗겨 얻는 모피 대신 구찌가 꺼내든 무기는 ‘에코 퍼’였습니다.

구찌뿐 아니라 패션을 이끄는 브랜드 사이에서 모피나 가죽을 없애는 흐름이 잔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국, 오스트리아, 덴마크와 같은 나라는 이미 모피 생산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합성 소재를 쓰는 것이 생태계를 망가뜨린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화답하며 합성 소재를 거듭 되살려 쓰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마 음이 놓입니다.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거듭나는 신발
2010년 기후변화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해마다 250억 켤레가 넘게 팔리는 신발은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짐승 가죽, 고무나 옷감을 만들면서 나오는 오염 물질, 재활용을 어렵게 하는 접착제며, 적어도 세 가지가 넘는 소재를 써야 한 켤레를 만들 수 있어 신발은 환경과 친해지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네이티브 슈즈’에서 한 가지 소재로만 만드는 신발 ‘제퍼슨 블룸’은 제작 시 오염 물질을 최소화하며 신을 수 없게 된 제품은 의자나 놀이터 쿠션 바닥으로 되살려낸다.

◦ 의자나 쿠션으로 되살아나는 신발
그런데 여기 캐나다 신발 브랜드 ‘네이티브 슈즈(Native Shoes)’는 소재 한 가지만 써서 신발을 만들어 내놔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제퍼슨 블룸(Jefferson Bloom)’이 그것입니다. 네이티브 슈즈는 미국에서 조류를 모아 가공하는 회사 ‘블룸(Bloom)’과 손을 잡고 새로운 EVA를 개발합니다. EVA(Ethylene Vinyl Acetate)는 고무처럼 부드러운 플라스틱으로 내구성이 좋고 다른 소재에 견줘 되살려 쓰기 쉬운 소재라서 크록스와 같은 신발 제작에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만들면서 환경오염 물질이 나온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블룸이 새로 만든 EVA는 기존 성분에 조류를 10% 섞어 넣어 기존 EVA보다 물을 80L나 맑히고, 이산화탄소 배출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네이티브 슈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는 신을 수 없는 낡은 신발을 돌려받아 그 신발에서 뽑아낸 플라스틱 소재로 의자나 놀이터 쿠션 바닥으로 되살려내는 ‘더 리믹스 프로젝트(The Remix Project)’를 펼치고 있습니다.

미국 여성화 로티스는 썩는 데만 500년이 걸린다는 버려진 페트병으로 여성용 플랫 슈즈를 만들었다.

◦ 독성 없는 신발로 되살아난 페트병
미국 여성화 ‘로티스(Rothy’s)’는 아예 새로운 재료를 쓰지 않고 썩는 데만 500년이 걸린다는 페트병을 되살려 만든 플랫 슈즈를 내놔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로티스는 2012년 투자은행에 다니던 호손 스웨이트와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마틴 이 뜻을 모아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멋지고 편안한 여성용 플랫 슈즈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덧붙여 신발을 만들면서 나오는 쓰레기를 줄여보자고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친환경 옷을 만드는 회사 ‘파타고니아’에서 영감을 얻어 거듭 살려 쓸 수 있는 소재로 신발을 만들자고 다짐합니다.

버려진 페트병을 아주 작은 구슬로 쪼개어 녹여낸 것에서 뽑은 폴리에스터 실로 신발 상단을 짭니다. 페트병 세 개면 신발 한 켤레가 태어납니다. 이제까지 3,500만 개가 넘는 페트병을 신발로 되살려냈습니다. 신발 바닥은 온실가스가 나오지 않도록, 탄소가 들어 있지 않은 고무와 독성이 없는 접착제를 쓰고, 제품 포장재도 재활용 소재를 써서 제대로 된 비건 신발을 만들어냅니다. 더구나 더는 신을 수 없을 만큼 낡은 신발은 로티스가 돌려받아 요가 매트로 탈바꿈시키거나 로티스 신발 밑창으로 되살려 씁니다. 여느 신발은 원단을 잘라 만들기 때문에 37%에 가까운 재료가 바로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로티스는 3D 프린터로 신발 모양에 맞춰 짜 올라가기 때문에 쓰레기가 6%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소재를 다시 되살려 쓸 수 있도록 개발된 운동화, 아디다스의 ‘퓨처크래프트 루프’

◦ 빌려 쓰는 신발
독일 스포츠 의류 용품 브랜드 아디다스도 소재를 거듭 되살려 쓸 수 있는 신발을 개발했습니다. ‘퓨처크래프트 루프(Futurecraft Loop)’란 이름의 이 운동화는 겉에서 바닥까지 한 가지 소재로 만들어 100% 되살려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낡아서 못 신게 된 운동화를 걷어 들여 되살린 새 운동화를 보내주는 정기 구독 틀을 갖추겠다고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폴 가우디오는 “루프 운동화는 신발을 갖는 것이 아니라 되살려 빌려 쓰는 신발”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아디다스는 여러 해 연구 끝에 여러모로 변형할 수 있고 되살려 써도 품질을 잃지 않는 ‘열가소성 폴리우레탄(TPU)’을 개발했습니다. 루프 운동화는 바닥부터 신발 끈까 지 모두 TPU로 만들어졌습니다. 낡은 루프 운동화를 걷어 들여 작은 알갱이로 부숴 녹여서 순도 높은 TPU로 탈바꿈하도록 해 루프 운동화로 다시 살려낸다는 것입니다.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 소재 ‘오션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운동화

◦ 해양 쓰레기가 신발로
아디다스는 2016년부터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로 만든 소재 ‘오션 플라스틱’으로 러닝화도 만들고 있습니다. 2015년 해양 환경보호 단체인 ‘팔리포더오션(Parley for the Oceans)’과 어깨동무한 아디다스는 앞으로 모든 제품에서 ‘플라스틱을 없애겠다’고 다짐합니다. 제품 생산을 하나하나 짚어본 결과, 플라스틱을 없애려면 제품 을 만드는 재료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아냅니다. 이 바탕에서 몰디브 바닷가에서 걷어 올린 그물과 플라스틱병 따위로 ‘오션 플라스틱’이라는 재료를 만듭니다. ‘울트라부스트 언케이지드 팔리’ 러닝화는 오션 플라스틱 95%와 재생 폴리에스터 5%를 써서 뛰어난 착용감을 내세우며, 신발 끈과 발목을 감싸는 ‘삭 라이너(Sock Liner)’, 굽까지 모두 되살려낸 재활용 물질을 썼습니다. 머잖아 품을 더 넓혀 오션 플라스틱으로 만든 옷도 내놓겠다고 합니다.

앓는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비건 패션의 자취를 더듬어보면 앓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험이 많은 전문가라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구찌는 “착한 소비를 앞세우는 밀레니얼 세대는 모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입사원 건의를 받아들여 산짐승 가죽을 벗긴 모피가 아닌 ‘에코 퍼’를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로티스 신발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공동 창업자 마틴이 “우리는 신발을 만드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다”고 털어놓을 만큼 신발 만드는 데 캄캄했습니다. 그래도 “버려지는 쓰레기를 거듭 되살려 생태계를 살리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신발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야!’라는 몸에 밴 틀이 없었기에 3D 프린터로 비건 신발을 만들어 널리 퍼뜨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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