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구상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변호사
정의의 어원과 서구에서의 정의
‘정의(正義)’라는 말은 근세 일본에서 ‘justice’, ‘Gerechtigkeit’의 번역어로 등장해 동양에서 통용되고 있다. 한중일에 ‘정(正)’과 ‘의(義)’의 개념은 있었지만, 정의(正義)는 (불경의) ‘올바른 해석·번역’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위 서구어의 번역어로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1)
‘justice’나 ‘Gerechtigkeit’에 대해서는 성서와 그리스-로마의 정치·법률학으로부터 오늘날의 철학·정치학·법학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이 있는데, 정(正)·의(義)의 글자를 통해 그 의미 내용을 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법(法)은 서양의 의회제도와 직결된 ‘law’, ‘Gesetz’의 번역어여서 물 수(水)·해태 치(廌)·갈 거(去)로 파자해 해석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서양에서 정의는 이해 분쟁의 처리 기준이 되는 권력 운영 방법에 관한 것으로서, 재판 기타 집권자의 처분·명령 또는 제정법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사용되어왔고, 법 원칙이나 국가사회의 운영 원리로 주장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교묘한 문답을 통해, ‘정의란 강자(强者)의 명령 또는 이익’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BC 459~400) 등 소피스트들로 하여금 국가사회의 올바른 운영 방법이 정의임을 수긍하게 했고,2)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적-보편적 정의로서의 덕행(德行)과 부분적 정의로서의 배분적 정의·평균적 정의를 주장했는데, 전자는 기여도에 상응하는 배분을, 후자는 대등 교환과 처벌에서의 동해보복을 의미했다.3)
성서의 10계명에서는 살·도·사음(邪淫)·위증 등을 금했고, 신구약의 여러 말씀과 사례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명하고 있다.
로마법에서는 키케로(Cicero, BC 106~43)의 표현이라고 알려진 “각자에게 그의 것을(Suum cuique)”이 정의에 관한 대표적 관용구였고, 이후의 여러 학설에서는 자연 질서·약속 준수·자유와 평등·다수나 공동체의 이익·약자 보호·지속 가능한 질서 등 여러 기준이 주장되었다.4)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좌우명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Fiat iustitia, et pereat mundus)” 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 등 정의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보기도 했다.
불교에서의 정의?
부처님 가르침의 주된 과제는 국가사회의 운영 방안보다는 생로병사 등 고(苦)로부터의 해탈과 열반이어서, ‘불교의 정의’는 서양의 정의 개념과는 발상점과 범위가 다르다.
고의 현황과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뜻하는 고제(苦諦·Dukkha)와 집제(集諦·Samudaya)에는 국가사회의 문제는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고, 그 해결 방법인 멸제(滅諦·Nirodha)와 도제(道諦·Marga)에서도 같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오직 올바른 법과 그것을 깨우치는 데 필요한 수행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주안(主眼)하시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궁극적 길이 아닌 것에는 말씀을 가리셨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외도 수행자에게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거나 (…) ‘여래는 끝나는 것도 아니고 끝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나는 괴로움의 진리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를 가려서 말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5)
그러한 연유인지 불교는 출세간의 종교이어서 세속 질서와는 무관하다는 오해도 많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불교는 자신과 세계를 능가하는 신비적·주술적 지배 수단인 초영지를 얻기 위한 몸과 정신의 집중적 수행을 요체로 하는 초세속적 구원론이어서, 합리적인 세속 내적 실천 윤리나 생활 방식을 도출할 방법이 없다”라고 했고, 정도전은 불교의 윤회론·인과론·심성론 등을 비판하면서 불교에는 사회윤리적 측면이 결여된 것처럼 매도했다. 학자 중에도 선(禪)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중심의 깨달음의 초월성이 사회적 윤리 실천에 장애가 된다는 견해, 개인적 해탈이라는 목표가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소극성을 초래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광도중생(廣度衆生)’을 위해 세상사의 근본 이치를 밝히고 궁극적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신 것이지, 세상을 벗어나는 것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인 초기 경전에 세속 문제가 상대적으로 적은 까닭은 질문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고, 왕이나 장자들의 세속 문제에 관한 질문에는 고구정녕(苦口叮嚀)히 답하셨는데, 본질은 충분히 말씀하셨다.
불교의 정의는 정법(正法)에 따른 여법(如法)한 생활과 국가사회질서에 귀착된다.6)
부처님께서는 인간 등 중생의 근본은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이고, 국가의 근원은 사회계약이었다고 하셨다. 국가 발생에 관해 “사악한 법들이 중생들에게 생겼기에 참으로 화를 내어야 할 경우 바르게 화를 내고, 비난해야 할 경우 바르게 비난하고, 추방해야 할 경우에는 바르게 추방하도록, 최초의 왕으로 ‘마하삼바따(Mahāsammata)’를 선출했다”고 하셨다.7)
삶의 올바른 길에 관해 살생을 끊고 중생을 보살피는 불살생(不殺生), 주어지지 아니한 것을 가지지 않고 널리 보시하는 불투도(不偸盜), 바르지 아니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불사음(不邪淫), 진실되지 아니한 말을 하지 않는 불망어(不妄語), 술 등 마음을 어지럽히는 물질을 취하지 않는 불음주(不飮酒)의 5계(五戒, pañca-śīla)를 설하셨고,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정업(正業 바른 행동)·정명(正命 바른 생활)·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정념(正念 바른 의식)·정정(正定 바른 집중)의 8정도(正道),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의 6바라밀, 또는 방편(方便)·원(願)·력(力)·지(智)를 더한 10바라밀, 직심(直心)·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의 3종심(種心)과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심(無量心) 그리고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의 4섭법(攝法) 등 보살행 등을 구족(具足)하게 가르치셨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켜야 하는 법과 정의도 위와 다르지 않다. “비구들이여, 정의로운 법왕인 전륜성왕도 그가 의지할 왕이 없으면 바퀴를 굴릴 수 없다. (…) 전륜성왕의 왕은 법이다. 정의로운 법왕인 전륜성왕은 오직 법을 의지하고, 존경하고, 중히 여기고, 경모하고, 승리의 표상으로 지니고, 깃발로 가지며, 법을 지배자로 여기고, 법답게 왕가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킨다”라고 하셨고, 또한 작은 나라 왕들이 전륜성왕에게 다스림을 받고자 하자 전륜성왕은 “그대들은 이미 나를 공양한 것이오. 다만 바른 법으로써 다스려 교화해서 치우치거나 왜곡되게 하지 말며 나라 안에 비법을 행하는 일이 없게만 하시오. 스스로 살생하지 말고 남도 가르쳐 살생하지 않게 하며, 도둑질·사음·이간하는 말·나쁜 말·거짓말·쓸데없는 말·탐내어 취함·질투·삿된 소견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하면 곧 나의 통치라고 이름할 것이오”라고 답했다고 하셨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유·평등·박애에 대해보면, 부처님께서는 해탈과 열반으로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얻는 방도에 관해 궁극적 해답을 주셨고, 평등에 관해서는 “사람의 귀천은 출생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이유로 카스트를 반대하셨으며, 수드라 출신 우바리(Upali) 존자는 계행 제1의 10대 제자가 되었다. 비구니 승단을 인정하시고, 공주 출생이 불만인 왕에게 “딸은 아들보다 더 좋은 후손임을 증명해줄 것이다”라고 하시는 등 여성해방에도 수천 년을 앞서셨다. 보편적 자비가 박애의 전형임은 말할 것도 없다.
대기설법에서는 인간관계의 유형에 따라 올바른 삶의 길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부자·형제·부부·안팎의 친척 사이에 서로 경애하여 미워하지 말고, 유무상통하여 아끼지 말며, 말과 안색이 늘 화평하여 서로 뜻이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등 가족·사용자와 피용자·사제의 도리 등을 밝히셨으며, 또한 왕법(王法)은 공평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보복이 아니라 궁극적 해탈로 이끌도록 진리와 인륜을 수호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삶의 도리와 수행의 길 그리고 그것에 의한 국가사회질서에는 광명과 힘이 있기 마련이어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고, 이를 부정하는 자는 유지될 수 없다.
<참고 문헌>
1) 강희원(2003),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비추어본 ‘법이념으로서 정의’”, 『법철학연구』 제6권 제2호, 한국법철학회, 59~60면
2) 박종현 역주(2003), 『플라톤의 국가·정체』, 서광사
3) 강희원의 앞의 글, 66~92면
4) 심헌섭(1993), “독일 철학 및 법철학에서의 정의론의 동향”, 『서울대학교 법학』 34권 3·4호, 39~64면; 이진우(1992), “정치적 정의론-칸트의 초월론적 법철학을 중심으로”, 『哲學硏究』 제49권, 대한철학회, 115~148면; 이동희(2004), “현대 법철학에 있어서의 정의의 기준에 관한 논의”, 『법학논총』 제28권, 단국대 법학연구소, 127~144면; 정세근(2004), “법의 정의론”, 『동서철학연구』 제33권, 한국동서철학회, 83~99면; 김민석(2019), “아퀴나스의 정의론: 정의의 목적으로서 공공선(common good) 추구”, 『신학사상』 제186권, 한신대 신학사상연구소, 323~353면; 김태균(2016),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에 관한 연구”, 『인권법연구』 제2권, 한국방송통신대, 92~134면 등
5) 김윤수 역주, 『장아함경Ⅱ』, 230~235면(『포타바루경』)
6) 조수동(2019), “불교의 정의론”, 『哲學論叢』 제95권 제1호, 새한철학회, 404면
7) 각묵 역(2006), 『세기경』, 『디가 니까야』 27권, 초기불전연구원, 172~173면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및 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구상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변호사
정의의 어원과 서구에서의 정의
‘정의(正義)’라는 말은 근세 일본에서 ‘justice’, ‘Gerechtigkeit’의 번역어로 등장해 동양에서 통용되고 있다. 한중일에 ‘정(正)’과 ‘의(義)’의 개념은 있었지만, 정의(正義)는 (불경의) ‘올바른 해석·번역’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위 서구어의 번역어로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1)
‘justice’나 ‘Gerechtigkeit’에 대해서는 성서와 그리스-로마의 정치·법률학으로부터 오늘날의 철학·정치학·법학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이 있는데, 정(正)·의(義)의 글자를 통해 그 의미 내용을 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법(法)은 서양의 의회제도와 직결된 ‘law’, ‘Gesetz’의 번역어여서 물 수(水)·해태 치(廌)·갈 거(去)로 파자해 해석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서양에서 정의는 이해 분쟁의 처리 기준이 되는 권력 운영 방법에 관한 것으로서, 재판 기타 집권자의 처분·명령 또는 제정법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사용되어왔고, 법 원칙이나 국가사회의 운영 원리로 주장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교묘한 문답을 통해, ‘정의란 강자(强者)의 명령 또는 이익’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BC 459~400) 등 소피스트들로 하여금 국가사회의 올바른 운영 방법이 정의임을 수긍하게 했고,2)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적-보편적 정의로서의 덕행(德行)과 부분적 정의로서의 배분적 정의·평균적 정의를 주장했는데, 전자는 기여도에 상응하는 배분을, 후자는 대등 교환과 처벌에서의 동해보복을 의미했다.3)
성서의 10계명에서는 살·도·사음(邪淫)·위증 등을 금했고, 신구약의 여러 말씀과 사례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명하고 있다.
로마법에서는 키케로(Cicero, BC 106~43)의 표현이라고 알려진 “각자에게 그의 것을(Suum cuique)”이 정의에 관한 대표적 관용구였고, 이후의 여러 학설에서는 자연 질서·약속 준수·자유와 평등·다수나 공동체의 이익·약자 보호·지속 가능한 질서 등 여러 기준이 주장되었다.4)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좌우명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Fiat iustitia, et pereat mundus)” 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 등 정의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보기도 했다.
불교에서의 정의?
부처님 가르침의 주된 과제는 국가사회의 운영 방안보다는 생로병사 등 고(苦)로부터의 해탈과 열반이어서, ‘불교의 정의’는 서양의 정의 개념과는 발상점과 범위가 다르다.
고의 현황과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뜻하는 고제(苦諦·Dukkha)와 집제(集諦·Samudaya)에는 국가사회의 문제는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고, 그 해결 방법인 멸제(滅諦·Nirodha)와 도제(道諦·Marga)에서도 같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오직 올바른 법과 그것을 깨우치는 데 필요한 수행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주안(主眼)하시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궁극적 길이 아닌 것에는 말씀을 가리셨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외도 수행자에게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거나 (…) ‘여래는 끝나는 것도 아니고 끝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나는 괴로움의 진리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를 가려서 말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5)
그러한 연유인지 불교는 출세간의 종교이어서 세속 질서와는 무관하다는 오해도 많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불교는 자신과 세계를 능가하는 신비적·주술적 지배 수단인 초영지를 얻기 위한 몸과 정신의 집중적 수행을 요체로 하는 초세속적 구원론이어서, 합리적인 세속 내적 실천 윤리나 생활 방식을 도출할 방법이 없다”라고 했고, 정도전은 불교의 윤회론·인과론·심성론 등을 비판하면서 불교에는 사회윤리적 측면이 결여된 것처럼 매도했다. 학자 중에도 선(禪)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중심의 깨달음의 초월성이 사회적 윤리 실천에 장애가 된다는 견해, 개인적 해탈이라는 목표가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소극성을 초래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광도중생(廣度衆生)’을 위해 세상사의 근본 이치를 밝히고 궁극적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신 것이지, 세상을 벗어나는 것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인 초기 경전에 세속 문제가 상대적으로 적은 까닭은 질문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고, 왕이나 장자들의 세속 문제에 관한 질문에는 고구정녕(苦口叮嚀)히 답하셨는데, 본질은 충분히 말씀하셨다.
불교의 정의는 정법(正法)에 따른 여법(如法)한 생활과 국가사회질서에 귀착된다.6)
부처님께서는 인간 등 중생의 근본은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이고, 국가의 근원은 사회계약이었다고 하셨다. 국가 발생에 관해 “사악한 법들이 중생들에게 생겼기에 참으로 화를 내어야 할 경우 바르게 화를 내고, 비난해야 할 경우 바르게 비난하고, 추방해야 할 경우에는 바르게 추방하도록, 최초의 왕으로 ‘마하삼바따(Mahāsammata)’를 선출했다”고 하셨다.7)
삶의 올바른 길에 관해 살생을 끊고 중생을 보살피는 불살생(不殺生), 주어지지 아니한 것을 가지지 않고 널리 보시하는 불투도(不偸盜), 바르지 아니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불사음(不邪淫), 진실되지 아니한 말을 하지 않는 불망어(不妄語), 술 등 마음을 어지럽히는 물질을 취하지 않는 불음주(不飮酒)의 5계(五戒, pañca-śīla)를 설하셨고,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정업(正業 바른 행동)·정명(正命 바른 생활)·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정념(正念 바른 의식)·정정(正定 바른 집중)의 8정도(正道),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의 6바라밀, 또는 방편(方便)·원(願)·력(力)·지(智)를 더한 10바라밀, 직심(直心)·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의 3종심(種心)과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심(無量心) 그리고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의 4섭법(攝法) 등 보살행 등을 구족(具足)하게 가르치셨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켜야 하는 법과 정의도 위와 다르지 않다. “비구들이여, 정의로운 법왕인 전륜성왕도 그가 의지할 왕이 없으면 바퀴를 굴릴 수 없다. (…) 전륜성왕의 왕은 법이다. 정의로운 법왕인 전륜성왕은 오직 법을 의지하고, 존경하고, 중히 여기고, 경모하고, 승리의 표상으로 지니고, 깃발로 가지며, 법을 지배자로 여기고, 법답게 왕가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킨다”라고 하셨고, 또한 작은 나라 왕들이 전륜성왕에게 다스림을 받고자 하자 전륜성왕은 “그대들은 이미 나를 공양한 것이오. 다만 바른 법으로써 다스려 교화해서 치우치거나 왜곡되게 하지 말며 나라 안에 비법을 행하는 일이 없게만 하시오. 스스로 살생하지 말고 남도 가르쳐 살생하지 않게 하며, 도둑질·사음·이간하는 말·나쁜 말·거짓말·쓸데없는 말·탐내어 취함·질투·삿된 소견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하면 곧 나의 통치라고 이름할 것이오”라고 답했다고 하셨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유·평등·박애에 대해보면, 부처님께서는 해탈과 열반으로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얻는 방도에 관해 궁극적 해답을 주셨고, 평등에 관해서는 “사람의 귀천은 출생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이유로 카스트를 반대하셨으며, 수드라 출신 우바리(Upali) 존자는 계행 제1의 10대 제자가 되었다. 비구니 승단을 인정하시고, 공주 출생이 불만인 왕에게 “딸은 아들보다 더 좋은 후손임을 증명해줄 것이다”라고 하시는 등 여성해방에도 수천 년을 앞서셨다. 보편적 자비가 박애의 전형임은 말할 것도 없다.
대기설법에서는 인간관계의 유형에 따라 올바른 삶의 길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부자·형제·부부·안팎의 친척 사이에 서로 경애하여 미워하지 말고, 유무상통하여 아끼지 말며, 말과 안색이 늘 화평하여 서로 뜻이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등 가족·사용자와 피용자·사제의 도리 등을 밝히셨으며, 또한 왕법(王法)은 공평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보복이 아니라 궁극적 해탈로 이끌도록 진리와 인륜을 수호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삶의 도리와 수행의 길 그리고 그것에 의한 국가사회질서에는 광명과 힘이 있기 마련이어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고, 이를 부정하는 자는 유지될 수 없다.
<참고 문헌>
1) 강희원(2003),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비추어본 ‘법이념으로서 정의’”, 『법철학연구』 제6권 제2호, 한국법철학회, 59~60면
2) 박종현 역주(2003), 『플라톤의 국가·정체』, 서광사
3) 강희원의 앞의 글, 66~92면
4) 심헌섭(1993), “독일 철학 및 법철학에서의 정의론의 동향”, 『서울대학교 법학』 34권 3·4호, 39~64면; 이진우(1992), “정치적 정의론-칸트의 초월론적 법철학을 중심으로”, 『哲學硏究』 제49권, 대한철학회, 115~148면; 이동희(2004), “현대 법철학에 있어서의 정의의 기준에 관한 논의”, 『법학논총』 제28권, 단국대 법학연구소, 127~144면; 정세근(2004), “법의 정의론”, 『동서철학연구』 제33권, 한국동서철학회, 83~99면; 김민석(2019), “아퀴나스의 정의론: 정의의 목적으로서 공공선(common good) 추구”, 『신학사상』 제186권, 한신대 신학사상연구소, 323~353면; 김태균(2016),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에 관한 연구”, 『인권법연구』 제2권, 한국방송통신대, 92~134면 등
5) 김윤수 역주, 『장아함경Ⅱ』, 230~235면(『포타바루경』)
6) 조수동(2019), “불교의 정의론”, 『哲學論叢』 제95권 제1호, 새한철학회, 404면
7) 각묵 역(2006), 『세기경』, 『디가 니까야』 27권, 초기불전연구원, 172~173면
구상진|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및 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명예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