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측면에서 보는
인공지능과 마음
홍성기
아주대학교 다산학부대학 명예교수

인공지능에 대한 2개의 사고 실험
1950년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은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한 실험을 제안했다. 기계와 인간이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대화할 때, 만약 제3자가 어느 쪽이 인간 혹은 기계인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이때 대화에 사용된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튜링 테스트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인지 기능이 판단 기준이다.
1980년 미국의 철학자인 존 설(John Searle)은 이른바 ‘중국어 방 논변(Chinese Room Argument)’으로 알려진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는데, 그는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할 수 있는 영어 매뉴얼을 갖고 있다. 이제 중국어로 질문이 제시되면 그는 매뉴얼을 보고 답변을 한다. 외부의 사람은 그가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존 설에 의하면 그는 다만 매뉴얼에 있는 중국어 구문론(syntax)에 맞추어 질문에 답할 뿐 중국어의 의미론(semantics)은 전혀 모른다는, 즉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의 중국어 방 논변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이해하는 강한 인공지능과, 특정 작업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약한 인공지능의 차이, 혹은 계산이라는 구문론적 작업과 이해라는 의미론의 차이를 부각시켰다. 즉 외적으로 드러난 인간과 기계의 인지 기능이 구별할 수 없더라도, 양자의 구별 기준은 내적으로 접근해 체험할 수 있는 이해, 의식, 마음의 유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철학: 그 핵심 질문
인공지능의 철학은 흔히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과 동일한지, 혹은 동일해질 수 있는지’를 핵심 문제로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의식(conciousness, awareness)’, ‘마음’, ‘자유의지’ 등등이 지능적 컴퓨터에게도 있는지를 묻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질문에 철학과 인공지능 두 영역의 전문가들이 모두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즉 전통적인 철학자와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의식’, ‘지능’ 등등 인간이나 동물에게나 사용했던 용어를 사용하면서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논한다. 그러니 1955년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들이 처음 만든 ‘인공지능’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잘못된 명칭이라는 주장이 당연히 존재한다. 이는 처음부터 컴퓨터 과학자들이 인간 수준의 일반적 인지 기능을 갖는 컴퓨터를 만들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공지능 분야는 처음부터 용어 자체를 의도적으로 인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챗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서 나타나는 맥락이 어긋나는 대답을 ‘출력 오류’라고 하지 않고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질문의 구조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인공지능은 센서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언어적 상황에서 반응·행동한다. 이때 인간과 인공지능의 이 ‘인지 과정’이 계산이라는, 특히 기호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컴퓨터는 말 그대로 프로그램 언어로 계산을 하고, 인간의 인지 과정에 추론 혹은 계산 과정이 있다. 만일 인간을 생물학적 기계라고 본다면 인간에게 의식이 있듯이 실리콘칩 기계인 인공지능에도 역시 의식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생물학적 기계라는 가정은 사실 확인되지 않았고, 또 ‘기계적’이라는 말의 뜻도 확실하지 않다.
다른 방향의 이야기도 있다. 인간의 두뇌는 2만 종류의 유전자, 10만 종류의 단백질, 신경세포 하나에 1조 개의 분자, 1,000억 개의 뉴런과 1,000조 개의 연결이 800개 이상의 영역에 걸쳐 있다고 한다. 계산주의가 큰 성과를 얻지 못한 반면, 컴퓨터의 연산 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인간의 신경망 구조를 모방한 컴퓨터 모형, 즉 연결주의 기반 AI가 게임체인저로 등장했다. 요즈음 미국, 중국의 기업들이 쏟아내고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경우,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인간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이른바 대규모 언어 모델은 바로 인간의 신경망을 모방한 성과로서, 인간의 지능을 닮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챗GPT의 자연스러운 대화 능력에 놀라 우리는 대화창 저편에 있는 대형 컴퓨터에 장착된 무수히 많은 칩 내부의 전자 뉴런의 사이에 혹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실제로 21세기 신경망 모델 AI 혁명의 대부로 알려진 힌튼(G. Hinton) 교수는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이 둘 다 신경망 연결 구조를 지니기에 양자의 지능이 동일한 종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인공지능 역시 사고하고, 이해하며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간도 인공지능도 그 어떤 신경망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 근거할 뿐, 이 둘의 동일성 여부, 그리고 신경망이 사고, 이해, 의식의 필요 혹은 충분조건 여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흔히 동일한 용어를 여러 영역에 사용한다. 인간이나 동물에 사용하는 ‘젊고 활기찬’이라는 수식어를 술의 품평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젊음과 술의 젊음이 동일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공지능을 단순히 도구로 보는 시각은 인공지능 전문가나 옹호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인공지능의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을 다른 의미를 지닌 동일한 용어의 사용으로 본다면 답은 간단하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비유가 표준어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더 착잡하다. 그 이유는 이 대화에 참여하는 철학자, 인공지능 연구가들이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현 상태에서 인간 수준의 일반 인공지능(AGI)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그 실현 가능성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즉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동일성, 상이성을 비교할 때, 비교의 기준도 비교의 대상도 모두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앞에 소개한 것처럼 인간과 컴퓨터의 특정 기능의 결과적 유사성을 기준으로 삼는 튜링 테스트가 있는 반면, 이해, 의식, 마음과 같이 1인칭 시점에서 접근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어떤 무엇을 인공지능에 요구하는 중국어 방 논변도 있다. 이것이 현재 인공지능의 철학적 핵심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철학이 다루는 핵심 질문은 결정적인 답을 할 수 있는 구조가 현재로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언어의 사용이 본질에 우선
그러나 인간은 특정 용어의 사용을 위해 철학의 허가를 받지 않는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물의 유형을 형성할 때 그 어떤 본질이 필요하지 않음은 유식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또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이 말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마음을 모방하면서 도입한 용어, 예를 들어 ‘지능’, ‘의식’, ‘의지’, ‘결정’ 등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면, 두 영역의 경계는 흐려지고 이 용어들은 마치 하나의 현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용된다. ‘부드럽다’라는 표현은 색, 형태, 소리, 촉감, 맛 그리고 마음에도 사용되지만 이들 간의 공통적 속성은 무엇일까? 공통점이라고는 ‘부드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어떤 부드러움을 느낀다는 점뿐이다. 특히 정보와 데이터의 경우 인간이 만든 것과 인공지능이 이를 가공해서 만든 것, 그리고 이 데이터를 다시 인간이 수정하고, 이를 다시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과정이 끝없이 벌어지는 21세기 정보 사회에서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결과를 분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와 교육: 관점(perspective)의 운용
정보와 지식의 습득 및 정리, 잠재적 패턴의 발견에서 인공지능은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인공지능이 학문, 경제, 문화 및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때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기본적인 방법은 방대한 양의 문제와 답(라벨)의 사례를 입력해 인공지능 스스로 어떤 패턴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와 답’이란 항상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묶인 것으로서, 패턴 형성은 바로 특정한 관점의 형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존의 관점을 그 어떤 이유에서 버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보기도 한다. 이것을 ‘창의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변화와 혁명을 추동한 것은 모두 새로운 관점의 도입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새로운 관점을 스스로 도입할 수 있을지, 혹은 할 수 있더라도 인간이 이를 허용할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대혼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새로운 관점의 도입, 즉 창의성이 항상 윤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의 관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기꾼도 어떤 의미에서는 창의적이고, 전쟁은 창의성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사실 인공지능의 광범위한 도입에도 ‘하여간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간 중심의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축소된 시야를 열기 위해서는 여러 관점을 종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것은 관점에 대한 관점 형성의 훈련을 받은 인공지능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여러 관점을 종합해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으로 이것은 단순히 계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의 종합 및 판단 능력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런 판단을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즉 종합적 판단능력은 사회가 교육을 통해 개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점의 제거, 즉 배움의 제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능력은 어떤 인공지능도 하기 어렵다고 보인다. 다른 한편 불교는 관점을 지우는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이처럼 배움을 지우는 것은 새로운 관점의 도입이나 시의적절한 판단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21세기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지식 자체와 반복적 행위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다. 여기서 관점에 대한 성찰은 인공지능의 철학이 제시할 수 있는 윤리와 교육의 방향이자 인공지능의 핵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일 수도 있다.
홍성기|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 대학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자르란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주대 기초교육대학(철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 대학 다산학부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 철학』, 『시간과 경계』, 『철학의 숲, 길을 묻다』(공저)가 있다.
철학적 측면에서 보는
인공지능과 마음
홍성기
아주대학교 다산학부대학 명예교수
인공지능에 대한 2개의 사고 실험
1950년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은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한 실험을 제안했다. 기계와 인간이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대화할 때, 만약 제3자가 어느 쪽이 인간 혹은 기계인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이때 대화에 사용된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튜링 테스트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인지 기능이 판단 기준이다.
1980년 미국의 철학자인 존 설(John Searle)은 이른바 ‘중국어 방 논변(Chinese Room Argument)’으로 알려진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는데, 그는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할 수 있는 영어 매뉴얼을 갖고 있다. 이제 중국어로 질문이 제시되면 그는 매뉴얼을 보고 답변을 한다. 외부의 사람은 그가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존 설에 의하면 그는 다만 매뉴얼에 있는 중국어 구문론(syntax)에 맞추어 질문에 답할 뿐 중국어의 의미론(semantics)은 전혀 모른다는, 즉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의 중국어 방 논변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이해하는 강한 인공지능과, 특정 작업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약한 인공지능의 차이, 혹은 계산이라는 구문론적 작업과 이해라는 의미론의 차이를 부각시켰다. 즉 외적으로 드러난 인간과 기계의 인지 기능이 구별할 수 없더라도, 양자의 구별 기준은 내적으로 접근해 체험할 수 있는 이해, 의식, 마음의 유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철학: 그 핵심 질문
인공지능의 철학은 흔히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과 동일한지, 혹은 동일해질 수 있는지’를 핵심 문제로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의식(conciousness, awareness)’, ‘마음’, ‘자유의지’ 등등이 지능적 컴퓨터에게도 있는지를 묻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질문에 철학과 인공지능 두 영역의 전문가들이 모두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즉 전통적인 철학자와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의식’, ‘지능’ 등등 인간이나 동물에게나 사용했던 용어를 사용하면서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논한다. 그러니 1955년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들이 처음 만든 ‘인공지능’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잘못된 명칭이라는 주장이 당연히 존재한다. 이는 처음부터 컴퓨터 과학자들이 인간 수준의 일반적 인지 기능을 갖는 컴퓨터를 만들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공지능 분야는 처음부터 용어 자체를 의도적으로 인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챗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서 나타나는 맥락이 어긋나는 대답을 ‘출력 오류’라고 하지 않고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질문의 구조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인공지능은 센서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언어적 상황에서 반응·행동한다. 이때 인간과 인공지능의 이 ‘인지 과정’이 계산이라는, 특히 기호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컴퓨터는 말 그대로 프로그램 언어로 계산을 하고, 인간의 인지 과정에 추론 혹은 계산 과정이 있다. 만일 인간을 생물학적 기계라고 본다면 인간에게 의식이 있듯이 실리콘칩 기계인 인공지능에도 역시 의식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생물학적 기계라는 가정은 사실 확인되지 않았고, 또 ‘기계적’이라는 말의 뜻도 확실하지 않다.
다른 방향의 이야기도 있다. 인간의 두뇌는 2만 종류의 유전자, 10만 종류의 단백질, 신경세포 하나에 1조 개의 분자, 1,000억 개의 뉴런과 1,000조 개의 연결이 800개 이상의 영역에 걸쳐 있다고 한다. 계산주의가 큰 성과를 얻지 못한 반면, 컴퓨터의 연산 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인간의 신경망 구조를 모방한 컴퓨터 모형, 즉 연결주의 기반 AI가 게임체인저로 등장했다. 요즈음 미국, 중국의 기업들이 쏟아내고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경우,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인간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이른바 대규모 언어 모델은 바로 인간의 신경망을 모방한 성과로서, 인간의 지능을 닮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챗GPT의 자연스러운 대화 능력에 놀라 우리는 대화창 저편에 있는 대형 컴퓨터에 장착된 무수히 많은 칩 내부의 전자 뉴런의 사이에 혹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실제로 21세기 신경망 모델 AI 혁명의 대부로 알려진 힌튼(G. Hinton) 교수는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이 둘 다 신경망 연결 구조를 지니기에 양자의 지능이 동일한 종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인공지능 역시 사고하고, 이해하며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간도 인공지능도 그 어떤 신경망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 근거할 뿐, 이 둘의 동일성 여부, 그리고 신경망이 사고, 이해, 의식의 필요 혹은 충분조건 여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흔히 동일한 용어를 여러 영역에 사용한다. 인간이나 동물에 사용하는 ‘젊고 활기찬’이라는 수식어를 술의 품평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젊음과 술의 젊음이 동일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공지능을 단순히 도구로 보는 시각은 인공지능 전문가나 옹호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인공지능의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을 다른 의미를 지닌 동일한 용어의 사용으로 본다면 답은 간단하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비유가 표준어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은 더 착잡하다. 그 이유는 이 대화에 참여하는 철학자, 인공지능 연구가들이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현 상태에서 인간 수준의 일반 인공지능(AGI)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그 실현 가능성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즉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동일성, 상이성을 비교할 때, 비교의 기준도 비교의 대상도 모두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앞에 소개한 것처럼 인간과 컴퓨터의 특정 기능의 결과적 유사성을 기준으로 삼는 튜링 테스트가 있는 반면, 이해, 의식, 마음과 같이 1인칭 시점에서 접근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어떤 무엇을 인공지능에 요구하는 중국어 방 논변도 있다. 이것이 현재 인공지능의 철학적 핵심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철학이 다루는 핵심 질문은 결정적인 답을 할 수 있는 구조가 현재로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언어의 사용이 본질에 우선
그러나 인간은 특정 용어의 사용을 위해 철학의 허가를 받지 않는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물의 유형을 형성할 때 그 어떤 본질이 필요하지 않음은 유식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또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이 말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마음을 모방하면서 도입한 용어, 예를 들어 ‘지능’, ‘의식’, ‘의지’, ‘결정’ 등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면, 두 영역의 경계는 흐려지고 이 용어들은 마치 하나의 현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용된다. ‘부드럽다’라는 표현은 색, 형태, 소리, 촉감, 맛 그리고 마음에도 사용되지만 이들 간의 공통적 속성은 무엇일까? 공통점이라고는 ‘부드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어떤 부드러움을 느낀다는 점뿐이다. 특히 정보와 데이터의 경우 인간이 만든 것과 인공지능이 이를 가공해서 만든 것, 그리고 이 데이터를 다시 인간이 수정하고, 이를 다시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과정이 끝없이 벌어지는 21세기 정보 사회에서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결과를 분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와 교육: 관점(perspective)의 운용
정보와 지식의 습득 및 정리, 잠재적 패턴의 발견에서 인공지능은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인공지능이 학문, 경제, 문화 및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때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기본적인 방법은 방대한 양의 문제와 답(라벨)의 사례를 입력해 인공지능 스스로 어떤 패턴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와 답’이란 항상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묶인 것으로서, 패턴 형성은 바로 특정한 관점의 형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존의 관점을 그 어떤 이유에서 버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보기도 한다. 이것을 ‘창의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변화와 혁명을 추동한 것은 모두 새로운 관점의 도입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새로운 관점을 스스로 도입할 수 있을지, 혹은 할 수 있더라도 인간이 이를 허용할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사회의 대혼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새로운 관점의 도입, 즉 창의성이 항상 윤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의 관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기꾼도 어떤 의미에서는 창의적이고, 전쟁은 창의성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사실 인공지능의 광범위한 도입에도 ‘하여간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간 중심의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축소된 시야를 열기 위해서는 여러 관점을 종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것은 관점에 대한 관점 형성의 훈련을 받은 인공지능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여러 관점을 종합해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으로 이것은 단순히 계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의 종합 및 판단 능력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런 판단을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즉 종합적 판단능력은 사회가 교육을 통해 개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점의 제거, 즉 배움의 제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능력은 어떤 인공지능도 하기 어렵다고 보인다. 다른 한편 불교는 관점을 지우는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이처럼 배움을 지우는 것은 새로운 관점의 도입이나 시의적절한 판단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21세기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지식 자체와 반복적 행위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다. 여기서 관점에 대한 성찰은 인공지능의 철학이 제시할 수 있는 윤리와 교육의 방향이자 인공지능의 핵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일 수도 있다.
홍성기|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 대학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자르란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주대 기초교육대학(철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 대학 다산학부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 철학』, 『시간과 경계』, 『철학의 숲, 길을 묻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