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불교
김한상
능인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조교수

여러 불교 부파 혼재한 가운데 7세기 아리 불교까지
상부 미얀마로 유입되며 미얀마의 종교 지도 더욱 복잡해져
미얀마는 불교 신자가 전 국민의 90%에 달하고 국토 곳곳에 불탑과 절이 산재할 만큼, 미얀마의 문화와 정체성과 불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미얀마인이 되는 것은 곧 불교인이 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미얀마에 불교는 언제 도입되었을까?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왕이 파견한 소나(Soṇa)와 웃타라(Uttara)라는 두 승려가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수완나부미는 ‘황금의 땅’이란 뜻으로, 하부 미얀마의 타톤(Thaton)과 태국 중부의 나콘 파톰(Nakon Pathom)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법 사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금석문적 증거는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금석문적인 증거에 따르면, 불교는 대략 서기 4세기부터 하부 미얀마의 몬족과 상부 미얀마의 퓨족 사이에서 융성하기 시작한 듯하다. 3세기 인도 나가르주나콘다(Nāgārjunakoṇḍa) 비문에 따르면 남인도 익슈바쿠(Ikṣvāku) 왕조의 비라푸루사닷타(Virapurusadatta)왕이 불교를 전파한 나라들 가운데 칠라타(Cilāta) 또는 키라타(Kirāta)라는 나라가 나온다. 역사가들은 이 나라를 몬족이 살던 곳으로 보고 있다. 상부 미얀마의 퓨족 사이에서도 불교가 번성했다. 퓨족의 도시 중 하나인 스리 크세트라(Śrī Kṣetra)에서 발굴된, 서기 5세기로 추정되는 팔리어 금석문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 7세기에 중국 승려 의정(義淨)이 쓴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과 10세기에 중국에서 편찬된 『구당서(舊唐書)』에도 당시 미얀마 불교의 현황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아마도 이 시기 미얀마는 남인도 계통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를 위시해 여러 불교 부파가 혼재했던 듯하다. 7세기에는 인도 또는 티베트에서 밀교적 색채의 아리(Ari) 불교까지 상부 미얀마로 유입되면서 미얀마의 종교 지도는 한층 복잡해진다. 아리 불교의 승려들은 살인자도 적절한 주문만 외운다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민중들에게 초야권(初夜權)을 행세했다고 한다.
아노야타왕 스리랑카 계통의 테라와다 불교 국교로 제정하고
아리 불교의 승려 축출… 스리랑카 승려 파견 요청 화답하며
양국 간 불교 교류의 본격적인 서막 시작
이러한 상황은 11세기 중반 아노야타(Anawratha)왕이 상부 미얀마의 바간(B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이후로 정리된다. 1057년 아노야타왕은 신 아라한(Shin Arahan)이라는 몬족 고승을 통해 스리랑카 계통의 테라와다 불교를 알게 되었다. 곧이어 왕은 이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아리 불교의 승려들을 축출했다. 그리고 타톤의 몬족 왕에게 팔리 삼장과 붓다 사리 일부를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이 거절당하자 아노야타왕은 타톤을 정복해 팔리 삼장을 비롯해 승려와 장인(丈人)을 파간으로 데려온다. 이 무렵 스리랑카 국왕 비자야 바후 1세(Vijāyabāhu I)는 남인도 촐라(Coḷa)의 침공으로 큰 타격을 입은 자국의 불교 교단을 재건하고자 아노야타왕에게 승려 파견을 요청했다. 아노야타왕은 이에 화답함으로써 양국 간 불교 교류의 본격적인 서막이 시작된다. 12세기에 들어와 스리랑카에서 마하위하라(Mahā-vihāra)를 정통파로 인정한 국가 주도의 종교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자 1180년에 웃타라지바(Uttarajīva)를 필두로 한 미얀마 승려들이 스리랑카에 건너온다. 이들 중 차파타(Chapaṭa)는 마하위하라에서 구족계를 받고 10년간 공부한 뒤 귀국해 바간에 마하위하라로 통일된 테라와다 불교를 도입했다. 미얀마 왕실은 새로 도입된 승가를 후원하긴 했지만 기존 승가를 없애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얀마 불교 교단은 기존의 미얀마 승가와 스리랑카 마하위하라 계통 승가의 두 개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상은 15세기 라만냐(Rāmañña)의 국왕 담마체티(Dhammacetī)의 교단 정화로 종식된다. 1475년에 왕은 22명의 자국 승려를 스리랑카에 파견해 콜롬보 교외의 칼야니(Kalyāṇī) 강에 뜬 배 위에서 마하위하라의 구족계를 받게 했다. 이들이 돌아오자, 왕은 바고(Bago)에 칼야니 시마(Kalyāṇī-sīmā)를 세우고 자국의 모든 승려가 여기서 마하위하라의 구족계를 다시 받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바고 교외에 남아 있는 칼야니 비문(Kalyani inscription)에 기록되어 있다. 바다 건너편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유럽 제국의 침탈을 당하면서 불교 교단도 차츰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행히 18세기 중반에 웰리위타 스리 사라난카라(Weliwita Sri Saranankara)의 주도로 스리랑카 승가는 태국 승가로부터 구족계 전통을 이어와 가까스로 부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시암 니카야(Siyam Nikāya)라는 종단은 오직 고산 지대의 고이가마(Goyigama) 카스트에게만 구족계를 주고 해안가의 하위 카스트에게는 사미계만을 주는 차별을 두었다. 이러한 불평등을 타파하고자 1800년에 다섯 명의 하위 카스트 승려로 구성된 대표단이 미얀마로 갔다. 이 대표단은 미얀마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돌아가 아마라푸라 니카야(Amarapura Nikāya)라는 종단을 설립했다. 1864년에는 암바가하왓테 사라나카라(Ambagahawatte Saranankara)가 미얀마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돌아가 1861년에 라만냐 니카야(Rāmañña Nikāya)라는 종단을 세운다. 2019년에는 이 두 종단이 아마라푸라-라만냐 니카야(Amarapura-Rāmañña Nikāya)라는 이름의 단일 종단으로 통합되어,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종단이 되었다. 그러니까 현재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종단은 미얀마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얀마와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불교라는 동일한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불교가 쇠퇴했거나 쇄신이 필요할 때마다 승려들을 상호 파견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국권 위기 타개 위해 불교 부흥 운동 벌이기도…
독립 이후 명상법 개발해 위빠사나 수행의 보급과 대중화에 공헌
19세기부터 미얀마는 인도에서 세력을 확립했던 영국과 충돌하면서 국권이 위태로워졌다. 국왕 민돈 민(Mindon Min)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불교 부흥 운동을 펼쳤다. 왕은 숲속 승려들을 왕궁으로 초청해 위빠사나 명상을 배웠으며, 1871년에는 수도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을 개최했다.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인 1904년 레디 사야도(Ledi Sayādaw)는 미얀마 전역을 다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아비담마 학습과 위빠사나 명상을 장려함으로써 불교 부흥 운동을 이어갔다. 미얀마 독립 이후에 마하시 사야도(Mahāsī Sayādaw)는 몸과 마음을 직접 관찰하는 것을 강조하는 체계적인 명상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미얀마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위빠사나 수행의 보급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
이제까지 미얀마 불교의 시작과 전법 교류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미얀마 불교의 미래는 어떠할까? 지금으로서는 이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말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불교가 계속해서 미얀마의 사회·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미얀마의 정정 불안은 불교에도 주요한 도전이 될 것이다.
김한상|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스리랑카 켈라니아 대학(University of Kelaniya)의 빨리불교학대학원(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PGIPBS)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동국대 불교대학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능인대학원대 불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얀마 불교
김한상
능인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조교수
여러 불교 부파 혼재한 가운데 7세기 아리 불교까지
상부 미얀마로 유입되며 미얀마의 종교 지도 더욱 복잡해져
미얀마는 불교 신자가 전 국민의 90%에 달하고 국토 곳곳에 불탑과 절이 산재할 만큼, 미얀마의 문화와 정체성과 불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미얀마인이 되는 것은 곧 불교인이 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미얀마에 불교는 언제 도입되었을까?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왕이 파견한 소나(Soṇa)와 웃타라(Uttara)라는 두 승려가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수완나부미는 ‘황금의 땅’이란 뜻으로, 하부 미얀마의 타톤(Thaton)과 태국 중부의 나콘 파톰(Nakon Pathom)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법 사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금석문적 증거는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금석문적인 증거에 따르면, 불교는 대략 서기 4세기부터 하부 미얀마의 몬족과 상부 미얀마의 퓨족 사이에서 융성하기 시작한 듯하다. 3세기 인도 나가르주나콘다(Nāgārjunakoṇḍa) 비문에 따르면 남인도 익슈바쿠(Ikṣvāku) 왕조의 비라푸루사닷타(Virapurusadatta)왕이 불교를 전파한 나라들 가운데 칠라타(Cilāta) 또는 키라타(Kirāta)라는 나라가 나온다. 역사가들은 이 나라를 몬족이 살던 곳으로 보고 있다. 상부 미얀마의 퓨족 사이에서도 불교가 번성했다. 퓨족의 도시 중 하나인 스리 크세트라(Śrī Kṣetra)에서 발굴된, 서기 5세기로 추정되는 팔리어 금석문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 7세기에 중국 승려 의정(義淨)이 쓴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과 10세기에 중국에서 편찬된 『구당서(舊唐書)』에도 당시 미얀마 불교의 현황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아마도 이 시기 미얀마는 남인도 계통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를 위시해 여러 불교 부파가 혼재했던 듯하다. 7세기에는 인도 또는 티베트에서 밀교적 색채의 아리(Ari) 불교까지 상부 미얀마로 유입되면서 미얀마의 종교 지도는 한층 복잡해진다. 아리 불교의 승려들은 살인자도 적절한 주문만 외운다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민중들에게 초야권(初夜權)을 행세했다고 한다.
아노야타왕 스리랑카 계통의 테라와다 불교 국교로 제정하고
아리 불교의 승려 축출… 스리랑카 승려 파견 요청 화답하며
양국 간 불교 교류의 본격적인 서막 시작
이러한 상황은 11세기 중반 아노야타(Anawratha)왕이 상부 미얀마의 바간(B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이후로 정리된다. 1057년 아노야타왕은 신 아라한(Shin Arahan)이라는 몬족 고승을 통해 스리랑카 계통의 테라와다 불교를 알게 되었다. 곧이어 왕은 이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아리 불교의 승려들을 축출했다. 그리고 타톤의 몬족 왕에게 팔리 삼장과 붓다 사리 일부를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이 거절당하자 아노야타왕은 타톤을 정복해 팔리 삼장을 비롯해 승려와 장인(丈人)을 파간으로 데려온다. 이 무렵 스리랑카 국왕 비자야 바후 1세(Vijāyabāhu I)는 남인도 촐라(Coḷa)의 침공으로 큰 타격을 입은 자국의 불교 교단을 재건하고자 아노야타왕에게 승려 파견을 요청했다. 아노야타왕은 이에 화답함으로써 양국 간 불교 교류의 본격적인 서막이 시작된다. 12세기에 들어와 스리랑카에서 마하위하라(Mahā-vihāra)를 정통파로 인정한 국가 주도의 종교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자 1180년에 웃타라지바(Uttarajīva)를 필두로 한 미얀마 승려들이 스리랑카에 건너온다. 이들 중 차파타(Chapaṭa)는 마하위하라에서 구족계를 받고 10년간 공부한 뒤 귀국해 바간에 마하위하라로 통일된 테라와다 불교를 도입했다. 미얀마 왕실은 새로 도입된 승가를 후원하긴 했지만 기존 승가를 없애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얀마 불교 교단은 기존의 미얀마 승가와 스리랑카 마하위하라 계통 승가의 두 개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상은 15세기 라만냐(Rāmañña)의 국왕 담마체티(Dhammacetī)의 교단 정화로 종식된다. 1475년에 왕은 22명의 자국 승려를 스리랑카에 파견해 콜롬보 교외의 칼야니(Kalyāṇī) 강에 뜬 배 위에서 마하위하라의 구족계를 받게 했다. 이들이 돌아오자, 왕은 바고(Bago)에 칼야니 시마(Kalyāṇī-sīmā)를 세우고 자국의 모든 승려가 여기서 마하위하라의 구족계를 다시 받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바고 교외에 남아 있는 칼야니 비문(Kalyani inscription)에 기록되어 있다. 바다 건너편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유럽 제국의 침탈을 당하면서 불교 교단도 차츰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행히 18세기 중반에 웰리위타 스리 사라난카라(Weliwita Sri Saranankara)의 주도로 스리랑카 승가는 태국 승가로부터 구족계 전통을 이어와 가까스로 부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세워진 시암 니카야(Siyam Nikāya)라는 종단은 오직 고산 지대의 고이가마(Goyigama) 카스트에게만 구족계를 주고 해안가의 하위 카스트에게는 사미계만을 주는 차별을 두었다. 이러한 불평등을 타파하고자 1800년에 다섯 명의 하위 카스트 승려로 구성된 대표단이 미얀마로 갔다. 이 대표단은 미얀마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돌아가 아마라푸라 니카야(Amarapura Nikāya)라는 종단을 설립했다. 1864년에는 암바가하왓테 사라나카라(Ambagahawatte Saranankara)가 미얀마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돌아가 1861년에 라만냐 니카야(Rāmañña Nikāya)라는 종단을 세운다. 2019년에는 이 두 종단이 아마라푸라-라만냐 니카야(Amarapura-Rāmañña Nikāya)라는 이름의 단일 종단으로 통합되어,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종단이 되었다. 그러니까 현재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종단은 미얀마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얀마와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불교라는 동일한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불교가 쇠퇴했거나 쇄신이 필요할 때마다 승려들을 상호 파견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국권 위기 타개 위해 불교 부흥 운동 벌이기도…
독립 이후 명상법 개발해 위빠사나 수행의 보급과 대중화에 공헌
19세기부터 미얀마는 인도에서 세력을 확립했던 영국과 충돌하면서 국권이 위태로워졌다. 국왕 민돈 민(Mindon Min)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불교 부흥 운동을 펼쳤다. 왕은 숲속 승려들을 왕궁으로 초청해 위빠사나 명상을 배웠으며, 1871년에는 수도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을 개최했다.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인 1904년 레디 사야도(Ledi Sayādaw)는 미얀마 전역을 다니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아비담마 학습과 위빠사나 명상을 장려함으로써 불교 부흥 운동을 이어갔다. 미얀마 독립 이후에 마하시 사야도(Mahāsī Sayādaw)는 몸과 마음을 직접 관찰하는 것을 강조하는 체계적인 명상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미얀마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위빠사나 수행의 보급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
이제까지 미얀마 불교의 시작과 전법 교류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미얀마 불교의 미래는 어떠할까? 지금으로서는 이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말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불교가 계속해서 미얀마의 사회·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미얀마의 정정 불안은 불교에도 주요한 도전이 될 것이다.
김한상|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스리랑카 켈라니아 대학(University of Kelaniya)의 빨리불교학대학원(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PGIPBS)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동국대 불교대학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능인대학원대 불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