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불교와 보살
스에키 후미히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교수
일본 불교는 『법화경』과 『무량수경』 등 초기 대승불교 바탕으로
실천적인 불교 전개…그 실천은 보살의 이상 실현을 지향
일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세속성에 있다. 일본 승려들이 대처(帶妻)하고 육식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현상만 보고 일본 불교가 타락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의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불교 사원이 있고, 불교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제도적으로는 17세기 도쿠가와 막부의 정책으로 사단(寺檀) 제도가 확립된 것이 크다. 이는 모든 국민이 가족 단위로 반드시 어느 한 사찰에 등록하도록 의무화한 것으로, 이를 통해 금교인 기독교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일종의 호적의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불교는 국교의 위치를 차지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유교의 힘에 의존해 국가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대에 일본에서는 불교가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일본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그 사상적 기반은 어디에 있었을까? 일본의 불교는 한역 불전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한국과 같다. 다만 이론적인 면보다 『법화경』과 『무량수경』 등 초기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불교를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그 실천은 보살의 이상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살의 실천은 자리・이타겸수(自利利他兼修)로 특징지을 수 있다. 원래 보살은 부처님의 전생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대승불교가 되면서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것이 대승불교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자기 이익과 함께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를 큰 목표로 내세우게 되었다.
사상적으로 보살의 문제를 자각적으로 다룬 사이초
일본에서도 이러한 보살의 사상과 실천은 일찍부터 받아들여졌지만, 사상적으로 보살의 문제를 자각적으로 다룬 것은 사이초(最澄, 766/767~822)가 처음이다. 사이초는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수계 후 스스로의 의지로 히에이산(比叡山)에 은거한다(785년). 그때의 발원문에서 이렇게 맹세하고 있다.
“원컨대 반드시 이번 생에 인과를 초월한 서원인 사홍서원에 이끌려 법계 전체로 건너가 육도(지옥·아귀·축생·수라·인·천)의 모든 곳에 들어가 부처님의 세계를 정화하고 정토를 이루며 중생의 소원을 성취해 미래세의 끝까지 항상 부처의 역할을 하리라.”
사이초는 불도 수행의 출발점에 서서 이러한 보살의 원대한 사홍서원을 세운 것이다. 이 보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말년의 사이초는 두 가지 큰 논쟁에 몸을 던졌다. 하나는 교리에 관한 논쟁으로 법상종의 도쿠이치(德一)와 격렬하게 싸웠다. 다른 하나는 대승계단 논쟁이다. 보살의 수행이라는 관점에서는 후자가 주목되므로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구족계의 수계 부정하며 이를 대체할 대승의 계율로 범망계 내세워
동아시아에서는 교단(승가)의 계율로 법장부의 『사분율』을 사용한다. 이 계는 2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족계라고 불린다. 이 계를 받음으로써 교단의 일원인 비구가 되고, 그 계를 지키며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사이초는 이 구족계의 수계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소승 부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승불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이초가 이를 대체할 대승의 계율로 들고 나온 것이 범망계다. 범망계는 『범망경』이라는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에 근거한 것으로, 대승 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로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軽戒, 10가지 중죄와 48가지 경죄)를 꼽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실제 승단을 유지하는 계율로는 불충분하다. 다만 『사분율』에 의한 구족계만으로는 대승 보살로서의 정신이라는 측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측면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범망계가 사용되었고, 『사분율』과 범망계는 병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범망계는 재가자에게도 수계되었으며, 감진(鑑真)이 일본에 와서 계율을 전할 때 쇼무 천황(聖武上皇) 등에게도 범망계를 주었다.
이러한 기존의 수계 방식에 대해 사이초는 그것만으로는 대소승의 병용이며, 순수한 대승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범망계는 재가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계율로 실제 승단을 운영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구족계와 병행하지 않고 그것만으로 출가자인 비구의 계율로 삼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러나 사이초는 거기에 대승불교의 보살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이초는 고닌(弘仁) 9년(818)부터 이듬해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가(嵯峨) 천황에게 범망계(梵網戒)에 의한 계율 수계를 위한 대승계단 개설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제출했다. 그것들은 각각 육조식, 팔조식, 사조식(四條式)이라 불리며 『산가학생식(山家学生式)』으로 정리되어 있다. 첫 번째 육조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보(國寶)란 무엇일까? 도심(道心,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보물로 삼는다. 도심이 있는 사람을 국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지름 한 뼘짜리 보배가 열 개가 있어도 국보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천일우(照千一隅, 천 리를 비추고 한구석을 지키는 사람)가 국보다”라고 했다. (중략) 도심이 있는 불제자를 서쪽(인도)에서는 보살이라 부르고, 동쪽(중국)에서는 군자라 부른다. (중략) 부처님의 가르침 중 출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승의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의 부류이다. 도심이 있는 불제자는 후자의 부류에 속한다. 지금 우리의 동쪽 섬나라(일본)에는 소승의 모습을 한 출가자만 있고 대승 부류는 없으며, 대승의 길은 널리 퍼져 있지 않다.”
‘국보’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국보라고 불리는 사람은 천 리 밖을 내다보는 동시에 발밑의 아주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다. 즉 세상 전체를 꿰뚫어 보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양면성이 있어야만 ‘국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초의 주장은 매우 웅대하다. 그 점은 이후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도심 있는 불자(佛子)’로서, 인도(불교)의 보살과 중국(유교)의 군자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존재로 간주된다. 그 보살의 머리가 국보이고, 군자의 머리가 군주가 된다.
이를 성립시키는 것이 범망계이며, 사조식에서는 이를 ‘진속일관(眞俗一貫)’이라고 부른다. ‘진’은 불법의 세계이고, ‘속’은 세속의 세계이다. 범망계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은 계로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여 둘 다 타인을 위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와 불교, 세속과 정신계의 협력 관계가 명시되어 있다.
불교의 윤회설이 근대 과학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등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 충분한 평가받지 못해
이후 일본 불교의 흐름 속에서 보살의 정신은 항상 중시되었다. 예를 들어 스승 에이존(叡尊, 1201~1290), 제자 닌쇼(忍性, 1217~1303)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차별받는 사람들과 한센병 환자 구제에 힘쓰고, 다리와 도로를 정비하는 등 사회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니치렌(日蓮, 1222~1282)은 『법화경』의 보살 정신을 높이 내세웠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보살론이 반드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정교분리 체제 속에서 종교는 사적인 문제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종교가 국가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사단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죽은 자의 장례는 불교 사원이 담당했지만, 이 역시 전근대의 잔재로 부정적으로만 여겨졌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불교의 윤회설이 근대 과학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보살이 세속 윤리와 다른 점은 현세뿐만 아니라 윤회를 반복하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윤회가 부정된다면 현세의 세속 윤리만으로 충분해진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회 참여 불교, 아직 시행착오의 단계에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기초 다져지지 않은 상태
20세기 말 이후 근대화가 정체되면서 종교의 역할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장례식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불교 사원의 역할은 인구 감소와 장례식의 간소화로 인해 유지가 어려워졌다. 그 대신 종교의 공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주목받게 되었다. 사회 참여 불교라고 불리는 것으로, 말기 환자 돌봄이나 재난 시 정신적 돌봄에 불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 시행착오의 단계에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 일본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한다면, 오랜 역사 속에서 쌓아온 보살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사이초의 이상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 활동하는 사람 또한 ‘세속의 보살’로 살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현세의 짧은 일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윤회를 반복하면서 모든 생명이 함께 깨달음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전쟁이 계속되고 지구 환경의 오염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일본 불교가 구축해온 보살의 이상은 새로운 정신적 지침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큰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번역 허우성|경희대학교 명예교수, 본지 편집위원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일본 도쿄(東京)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문학 박사. 도쿄대 문학부 교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동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일본 사상사-과거를 통해 미래를 응시하다』, 『대승불교의 실천』(공저), 『붓다와 정토』가 있다.
일본 불교와 보살
스에키 후미히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교수
일본 불교는 『법화경』과 『무량수경』 등 초기 대승불교 바탕으로
실천적인 불교 전개…그 실천은 보살의 이상 실현을 지향
일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세속성에 있다. 일본 승려들이 대처(帶妻)하고 육식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현상만 보고 일본 불교가 타락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의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불교 사원이 있고, 불교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제도적으로는 17세기 도쿠가와 막부의 정책으로 사단(寺檀) 제도가 확립된 것이 크다. 이는 모든 국민이 가족 단위로 반드시 어느 한 사찰에 등록하도록 의무화한 것으로, 이를 통해 금교인 기독교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일종의 호적의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불교는 국교의 위치를 차지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유교의 힘에 의존해 국가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대에 일본에서는 불교가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일본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그 사상적 기반은 어디에 있었을까? 일본의 불교는 한역 불전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한국과 같다. 다만 이론적인 면보다 『법화경』과 『무량수경』 등 초기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불교를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그 실천은 보살의 이상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살의 실천은 자리・이타겸수(自利利他兼修)로 특징지을 수 있다. 원래 보살은 부처님의 전생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대승불교가 되면서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것이 대승불교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자기 이익과 함께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를 큰 목표로 내세우게 되었다.
사상적으로 보살의 문제를 자각적으로 다룬 사이초
일본에서도 이러한 보살의 사상과 실천은 일찍부터 받아들여졌지만, 사상적으로 보살의 문제를 자각적으로 다룬 것은 사이초(最澄, 766/767~822)가 처음이다. 사이초는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수계 후 스스로의 의지로 히에이산(比叡山)에 은거한다(785년). 그때의 발원문에서 이렇게 맹세하고 있다.
“원컨대 반드시 이번 생에 인과를 초월한 서원인 사홍서원에 이끌려 법계 전체로 건너가 육도(지옥·아귀·축생·수라·인·천)의 모든 곳에 들어가 부처님의 세계를 정화하고 정토를 이루며 중생의 소원을 성취해 미래세의 끝까지 항상 부처의 역할을 하리라.”
사이초는 불도 수행의 출발점에 서서 이러한 보살의 원대한 사홍서원을 세운 것이다. 이 보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말년의 사이초는 두 가지 큰 논쟁에 몸을 던졌다. 하나는 교리에 관한 논쟁으로 법상종의 도쿠이치(德一)와 격렬하게 싸웠다. 다른 하나는 대승계단 논쟁이다. 보살의 수행이라는 관점에서는 후자가 주목되므로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구족계의 수계 부정하며 이를 대체할 대승의 계율로 범망계 내세워
동아시아에서는 교단(승가)의 계율로 법장부의 『사분율』을 사용한다. 이 계는 2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족계라고 불린다. 이 계를 받음으로써 교단의 일원인 비구가 되고, 그 계를 지키며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사이초는 이 구족계의 수계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소승 부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승불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이초가 이를 대체할 대승의 계율로 들고 나온 것이 범망계다. 범망계는 『범망경』이라는 중국에서 찬술된 경전에 근거한 것으로, 대승 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로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軽戒, 10가지 중죄와 48가지 경죄)를 꼽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실제 승단을 유지하는 계율로는 불충분하다. 다만 『사분율』에 의한 구족계만으로는 대승 보살로서의 정신이라는 측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측면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범망계가 사용되었고, 『사분율』과 범망계는 병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범망계는 재가자에게도 수계되었으며, 감진(鑑真)이 일본에 와서 계율을 전할 때 쇼무 천황(聖武上皇) 등에게도 범망계를 주었다.
이러한 기존의 수계 방식에 대해 사이초는 그것만으로는 대소승의 병용이며, 순수한 대승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범망계는 재가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계율로 실제 승단을 운영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구족계와 병행하지 않고 그것만으로 출가자인 비구의 계율로 삼기에는 무리가 많다. 그러나 사이초는 거기에 대승불교의 보살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이초는 고닌(弘仁) 9년(818)부터 이듬해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가(嵯峨) 천황에게 범망계(梵網戒)에 의한 계율 수계를 위한 대승계단 개설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제출했다. 그것들은 각각 육조식, 팔조식, 사조식(四條式)이라 불리며 『산가학생식(山家学生式)』으로 정리되어 있다. 첫 번째 육조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보(國寶)란 무엇일까? 도심(道心,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보물로 삼는다. 도심이 있는 사람을 국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지름 한 뼘짜리 보배가 열 개가 있어도 국보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천일우(照千一隅, 천 리를 비추고 한구석을 지키는 사람)가 국보다”라고 했다. (중략) 도심이 있는 불제자를 서쪽(인도)에서는 보살이라 부르고, 동쪽(중국)에서는 군자라 부른다. (중략) 부처님의 가르침 중 출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승의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의 부류이다. 도심이 있는 불제자는 후자의 부류에 속한다. 지금 우리의 동쪽 섬나라(일본)에는 소승의 모습을 한 출가자만 있고 대승 부류는 없으며, 대승의 길은 널리 퍼져 있지 않다.”
‘국보’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국보라고 불리는 사람은 천 리 밖을 내다보는 동시에 발밑의 아주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다. 즉 세상 전체를 꿰뚫어 보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양면성이 있어야만 ‘국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초의 주장은 매우 웅대하다. 그 점은 이후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도심 있는 불자(佛子)’로서, 인도(불교)의 보살과 중국(유교)의 군자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존재로 간주된다. 그 보살의 머리가 국보이고, 군자의 머리가 군주가 된다.
이를 성립시키는 것이 범망계이며, 사조식에서는 이를 ‘진속일관(眞俗一貫)’이라고 부른다. ‘진’은 불법의 세계이고, ‘속’은 세속의 세계이다. 범망계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은 계로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여 둘 다 타인을 위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와 불교, 세속과 정신계의 협력 관계가 명시되어 있다.
불교의 윤회설이 근대 과학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등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 충분한 평가받지 못해
이후 일본 불교의 흐름 속에서 보살의 정신은 항상 중시되었다. 예를 들어 스승 에이존(叡尊, 1201~1290), 제자 닌쇼(忍性, 1217~1303)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차별받는 사람들과 한센병 환자 구제에 힘쓰고, 다리와 도로를 정비하는 등 사회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니치렌(日蓮, 1222~1282)은 『법화경』의 보살 정신을 높이 내세웠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보살론이 반드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정교분리 체제 속에서 종교는 사적인 문제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종교가 국가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사단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죽은 자의 장례는 불교 사원이 담당했지만, 이 역시 전근대의 잔재로 부정적으로만 여겨졌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불교의 윤회설이 근대 과학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보살이 세속 윤리와 다른 점은 현세뿐만 아니라 윤회를 반복하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윤회가 부정된다면 현세의 세속 윤리만으로 충분해진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회 참여 불교, 아직 시행착오의 단계에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기초 다져지지 않은 상태
20세기 말 이후 근대화가 정체되면서 종교의 역할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장례식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불교 사원의 역할은 인구 감소와 장례식의 간소화로 인해 유지가 어려워졌다. 그 대신 종교의 공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이 주목받게 되었다. 사회 참여 불교라고 불리는 것으로, 말기 환자 돌봄이나 재난 시 정신적 돌봄에 불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 시행착오의 단계에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 일본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한다면, 오랜 역사 속에서 쌓아온 보살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사이초의 이상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 활동하는 사람 또한 ‘세속의 보살’로 살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현세의 짧은 일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윤회를 반복하면서 모든 생명이 함께 깨달음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전쟁이 계속되고 지구 환경의 오염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일본 불교가 구축해온 보살의 이상은 새로운 정신적 지침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큰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번역 허우성|경희대학교 명예교수, 본지 편집위원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일본 도쿄(東京)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문학 박사. 도쿄대 문학부 교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동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일본 사상사-과거를 통해 미래를 응시하다』, 『대승불교의 실천』(공저), 『붓다와 정토』가 있다.